그루지야 전쟁과 동유럽 세계 세계에 대한 관심

러시아가 공식 참전한 8월 8일을 기점으로 개전 3, 4일째를 맞고 있는 현재, 전황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러시아 항공기가 격추된 것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러시아 공군은 수도 트빌리시의 국제공항과 바지아니 공군기지 및 항공기 수리/생산 공장, 항구도시 포티, BTC 송유관, (스탈린의 고향이기도 한) 고리의 군사시설 등을 맹폭했다. 미군의 항공 작전에 비교하면 별 거 아닌 수준이지만 공격은 빠르게 그루지야 전역으로 확대되는 분위기이다.

기함 모스크바(슬라바급 순양함)를 중심으로 한 흑해함대 전력이 이미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항구에 입항 및 인근해역에서의 해상봉쇄에 착수, 우크라이나 곡물운송선이 저지당하는 등 봉쇄작전도 시작되었다. 해상봉쇄 중인 함대에 상륙함 3척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들 상륙함에 해군육전대가 탑승해 있으며 상륙전을 해올 것이라는 그루지야 정부관리의 불안감 섞인 발언도 나오고 있다.그루지야의 또 다른 자치공화국인 압하지야는 동원령을 선포하고 자치지역 내의 그루지야 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런 전황과 별개로 동유럽 세계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눈치이다. 동유럽 세계는 구소련 붕괴 이후 줄줄이 말을 바꿔 타며(세르비아, 벨로루시 제외) 친미의 기치를 치켜 올렸다. 폴란드-루마니아 라인까지는 보리스 옐친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까지는 사실상 이를 묵인하고 인정했는데 문제는 발트3국과 그루지야, 우크라이나가 연달아 말을 갈아탔다는 점이다.


보라 색 : 냉전시기 동서 양측의 경계선
파란 색 :  냉전 이후 러시아가 묵인한 서방세계(EU-NATO)의 진출선
붉은 색 : 부시 행정부 이후 러시아와 마찰을 빚으면서도 확대된 서방세계의 진출선
하늘 색 대각선 : CIS 회원국 중 반러 친미적 성향의 국가들이 결성한 구암(GUAM, 회원국들의 머릿글자를 딴 명칭) 회원국들.
A : 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B : 흑해함대 주둔지 셰바스토폴


이들 동유럽 세계는 미국으로 말을 갈아탔으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공포를 역사적으로 매우 잘 체감하고 있는 지역들이다.(3국분할 및 독소분할로 나뉘어졌던 폴란드, 2차대전 이래 꾸준히 소련의 억압된 통치를 받아온 발트3국, 제정러시아 및 소련 시기를 통틀어 처참한 수탈과 전화를 겪은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이들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귀환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며,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귀환은 끔직한 악몽이 되는 것이다. 당장 헝가리나 체코, 기타 발칸 국가들에겐 러시아가 돌아온다 해도 당장 자기들이 피해를 입는 게 아니라 든든한 방패들이 있으니 큰 걱정은 없지만-오히려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다시 말 바꿔타는 걸 고려 중인 나라도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나라들-폴란드는 러시아와의 국경은 매우 좁은 편이지만 대신 러시아의 실질적 영향력 아래 있는 벨로루시와 동부국경을 접하고 있다.-로선 당장 그루지야 전쟁은 자신들도 당할 수 있다는 심각한 위기인식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감히 우크라이나가 말을 바꿔 타면서 흑해함대의 안정적 유지가 어려워지고 있고 발트 3국이 서방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제정러시아의 수도이자 제2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서방진영 바로 코앞에 노출되어 버렸다. 러시아가 발트 3국 및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격렬하게 반대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전쟁이 터졌다. 초반의 막대한 민간인 희생 및 알아서 명분을 러시아에 갖다 바친 그루지야의 대 실수는 서유럽 제국 및 미국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만들었다.-홍해에 미 항모 3척이 있으며 이것이 이번 전쟁에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동지중해와 홍해, 걸프만 일대는 미 해군이 항시 대기 중이다. 하물며 이라크 및 아프간이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사실 적극적인 지원 능력 자체도 서방 세계는 상실한 지 오래이고, 지원한다 해도 러시아와 전쟁을 할 배짱의 국가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러시아가 옛 구소련만큼은 아니라지만.

이렇게 되면 몸이 다는 것은 동유럽 세계이다. 그루지야가 이대로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린다면-실제로 러시아는 매우 제한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그루지야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러시아 참전 3일만에, 휴전을 제의하고 남오셰티아에서 전면 퇴각 중인 그루지야가 아닌가?- 확실한 사례가 생기는 것이다. 러시아가 말 안 듣는 주변 옛 동맹국이자 배신자들을 처단할 수 있다는 확실한 사례가 말이다. 그것도 서방은 개입조차 하지 못한 채.

폴란드와 발트 3국이 공동으로 러시아를 강력 비난하고, 역시 폴란드가 EU 정상회의 개최 요구 카프카즈 지역으로의 EU 파병을 주장한 것을 협상을 위한 외교적 수사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다음에는 내가 당한다!는 절박한 위기인식 속에서 나오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에서 작전 후 귀환할 러시아 해군함정의 입항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인식이다.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에서 그루지야가 두 손 들고 러시아가 남오셰티아에서의 우위를 인정하는 수준에서 전쟁이 조기 종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동유럽 세계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동유럽 세계가 원하는 것은 전쟁의 조기종결이 아니라, 서방 세계가 개입한 후의 전쟁 종결이다.

서방 세계가 개입하지 않은 채로 이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동유럽 국가들에겐 좋지 않은 선례가 남게 되고, 서방이 자신들을 보호할 거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채 러시아와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동유럽 세계는 서방이 그루지야 전쟁에 개입해 러시아에 어떻게든 압력을 넣어 전쟁을 끝내길 바라지,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의 조기 종결을 바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때까지, 백 명이 죽던 천 명이 죽던 만 명이 죽던 그건 동유럽 세계가 알 바 아니다. 그루지야인 100만 명이 죽어도 동유럽 세계는 그저 자기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선 전쟁은 서방 세계가 개입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고 또 확대되어야 한다. 서방이 개입하지 않고 이 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은 바로 자기들이 되니까.

덧글

  • 로리 2008/08/11 03:37 # 답글

    하지만 서방이 개입하면 까딱 잘못하면 그 여파가 너무 커질텐데 말입니다...
  • Ladenijoa 2008/08/11 19:09 #

    서방은 개입 못 할 겁니다. 개입하면 여파가 너무 커질 거라는 걸 서방도 잘 알거든요.
  • BigTrain 2008/08/11 09:21 # 답글

    그런데 구두개입 이상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_- 그루지야가 명분을 줘 버리는 바람에 --;
  • Ladenijoa 2008/08/11 19:10 #

    말로 떠드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죠. 그렇기에 동유럽은 더더욱 몸이 달을 수밖에요 ㅎㅎ
  • 곤충 2008/08/11 09:21 # 삭제 답글

    과거 냉전시절 케네디가 말한 '동맹국이 떠나갈거야.'부분이 재현되는 느낌든다면 착각일까요?
  • Ladenijoa 2008/08/11 19:10 #

    비슷합니다.
  • 【天指花郞】 2008/08/11 09:39 # 답글

    그러고보니 언젠가 어느 분이 쓴 제3차세계대전 시나리오 초반부가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기습점령하는 거였는데. -_-;;
  • Ladenijoa 2008/08/11 19:10 #

    호오옿...
  • 【天指花郞】 2008/08/12 10:53 #

    그게 아마 뎁콘카페에서 내가 고딩때 본 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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