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24일
아무거나 세계사 (5) - 베르사유 체제하 집단안전보장체제
1914년 8월부터 4년간 전 유럽을 잿더미로 만들고 천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가져다 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유럽 각국들은 더 이상 유럽대륙에 이런 비참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이라 쓰고 자기 나와바리 건드리는 겁대가리 없는 놈(독일)이 다시는 못 일어나도록-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고자 합니다.
때문에 어느 특정국가(독일-_-;;)가 무력도발을 하더라도 유럽의 각국(승전국 연합;;)이 뭉쳐서 공동으로 대응해 유럽 평화를 해치는 나라 및 집단에 응징을 가하는 체제가 완성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이 체제는 프랑스가 각각 영국,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와 군사동맹 및 우호협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형성됩니다.

위 지도에서 제가 표시한 대로, 갈색 원으로 체크된 국가들이 바로 유럽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입니다. 말이 집단안전보장체제지 사실상 대 독일 포위망이었죠.(...) 프랑스는 유럽의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기존 대독 전승국들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에 대한 동서남부 및 해상에서의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우선적으로 세계최강 대영제국은, 해군력을 상실한 독일을 바다에서 봉쇄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 서부에서 유럽 최대의 육군국이자 동맹의 주도국답게 독일에 대한 서부 방면에서의 압력을 주도했고, 서부에서의 대독 포위망은 1914년 8월 이전까진 중립국이었던 벨기에의 가세로 인해 한층 튼튼해집니다.
독일 남부에서는 1915년 연합국으로 참전한 이탈리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붕괴 이후 알프스의 소국으로 전락하면서 이탈리아의 세력권으로 사실상 공인받는 국가가 된 덕에 남부 포위망을 한층 굳건하게 해주었죠. 동부에서는 각각 러시아와 합스부르크에서 떨어져 나온 신생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양국이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독일 동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소련을 견제했습니다.
1920년대의 유럽 집단안전보장체제는 실제 1934년까지 무난하게 작동했으나 패전 당사국인 독일을 지나치게 고립으로 몰아넣었고,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련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1935년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1935년 3월 16일, 독일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재군비를 공식 선언합니다.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고 즉시 유럽 열강들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합니다. 같은 해 4월 14일, 이탈리아 북부 휴양도시 스트레사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 나발(Pierre Laval, 훗날 비시정부 외상 및 수상 역임. 대독 부역혐의로 총살당함), 영국 수상 램시 맥도널드(Ramsay MacDonald), 이탈리아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3인이 모여 독일에 대한 공동전선 형성과 대응을 결의합니다. 스트레사 체제, 혹은 스트레사 전선(Stresa Front)의 형성이죠.
그런데 이 스트레사 전선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스트레사 전선의 한 축인 영국이 1935년 6월 18일, 재군비를 선언한 당사자 독일과 영독 해군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입니다.(-_-;;;) 영독 해군협정은 독일 해군을 영국 해군의 35% 수준까지 증강시킬 수 있는 권리 및 잠수함의 건조 및 보유 권리를 독일에게 부여했습니다. 둘 다 베르사유 체제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던 것이고, 승전국이자 스트레사 전선의 한 축인 영국은 영독 해군협정을 통해 독일의 재군비 선언을 사실상 공인-_-;;한 겁니다.
사실 영독 해군협정에는 여러 배경이 있습니다. 우선 1934년 1월 16일 체결된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입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영토분쟁은 당시 유럽 국제외교무대에서도 유럽에서 가장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꼽혔고, 굳이 히총통 아니더라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독일은 단치히 회랑 등을 놓고 폴란드와 영토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히총통은 덥썩 폴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폴란드 국경분쟁을 해소하여 유럽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죠.(먼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해 영국에서는 "호옿, 저 친구 무대뽀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합리적인데? 외교적으로 협상할 만한 파트너가 되겠군."이라는 사상 최대의 오판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오판은 1933년 1월, 히틀러를 수상으로 올리기로 합의하고 연립내각을 구성한 파펜 및 브롬베르크도 한 오판이죠. 역사는 반복되는 겁니다.(...)
더군다나 강철의 대원수께서 군림하시는 소비에트 연방의 성장을 두려워하던 영국은 역시, 공산당을 철저히 싫어하고 총리 되자마자 제일 먼저 때려잡자 공산당!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를 실천하신 히총통을 높게 평가(...)했고, 독일이 어느정도 재군비를 하는 것이 소련 견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스트레사 전선을 무시한 영독 해군협정의 체결인 거죠.-_-;;
영독 해군협정의 체결로 인해 붕괴된 스트레사 전선은 곧, 유럽 집단안전보장체제의 한 축이 이탈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독일의 재군비 선언과 그 이후 영독 해군협정을 지켜보던 로마의 두체께옵서 혼란에 빠질 유럽의 미래를 읽으시고는 "패전국 독일도 재군비하는데 승전국인 우리 대 로마제국이 아프리카 깽깽이 나라 하나 먹는다고 뭐라 안 하겠지?"라 생각하시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신 겁니다.(...)
1935년 10월부터 1936년 5월까지 진행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군은 40여년 전의 제1차 전쟁과 달리 이탈리아의 침공에 힘 한 번 못쓰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비난의 열을 올리고 제재조치를 취합니다만 제재조치가 전혀 쓰잘데기 없는 거여서 두체의 에티오피아 정복을 전혀 막지 못하죠-_-;;
패망 후인 1936년 6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이제 국제간의 도덕은 그 밑바닥부터 뒤집히려 하고 있다. 어떤 나라가 조약에 건 신뢰가 손상되고, 특히 국가의 안전과 독립을 존중하며 그것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건 건 소국의 희망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며 내일의 당신들의 모습이다."라고 일갈합니다만 아무도 이 망국의 군주가 내뱉는 말따위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3년 뒤부터 알바니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이 아주 뼈저리게 그 일갈을 깨닫습니다만 이미 뒷북이죠 둥둥
한편, 두체께옵서 아디스 아바바 레이스를 하고 계시던 1936년 3월 7일, 두체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자신감을 얻은 베를린의 히총통께옵서 라인란트 진주를 단행합니다. 즉각적인 프랑스의 침공을 두려워 한 일부 장성들의 극렬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총통의 무대뽀 정신은 비무장지대로 선포되어 있던 라인란트 진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역시 서방 세계는 경악하며 다시 한 번 독일에 대한 강경대응을 논의합니다...만 이미 남부 축선의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서 식민지 놀이를 하시냐 영프와 각을 세우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영국은 영국대로 1935년 영독 해군협정을 아직 믿고 있었습니다. 라인란트 주둔이 영독 해군협정의 파기는 아니었던 거죠. 다만 영국은 프랑스가 결심하면 같이 행동할 정도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영국을 못 믿었습니다.(...-_-) 이미 1935년에 한 번 멋지게 뒤통수를 얻어터진 기억이 있는 프랑스는 실제 대독개전시 영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대독 개전을 할 지 매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양국관계가 견원지간이기도 했는데 실제 뒤통수까지 얻어맞은 후이니 말 다했죠. 거기다 이탈리아가 참가할 가능성은 제로.
거기다가 프랑스는 곧 총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 정치인들은 당장 눈앞의 선거가 중요하죠. 그런 겁니다.(...) 불과 20년 전에 처참한 전쟁을 겪은 유럽인들은 참호전과 독가스 전쟁이라는 대량살상의 처참한 광경을 기억하고 있었고 때문에 유럽 강대국들간의 전쟁을 매우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상황에서 전쟁따윌 했다가 혹시라도 1차대전처럼 장기전화 되거나 대규모 인명피해가 나면 선거에서 개피보는 겁니다.(...)
예, 그래서 1936년 3월에도 유럽 집단안전보장체제는 전혀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 다시 또 하나의 국가가 이 안전보장체제에서 이탈합니다. 벨기에죠.(...) 1914년 8월, 독일의 침공 직전까진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프랑스가 독일의 라인란트 주둔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는 걸 보고 경악하며 다시 중립으로 돌아갔습니다.(...)
1938년 3~4월의 오스트리아 위기때에도 유럽의 집단안전보장체제는 있으나 마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대해 가장 큰 지분이 있던 이탈리아의 두체 무솔리니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인정하고 대신 남부 티롤의 이탈리아 영유권을 독일로부터 인정받은 거죠.(*남부 티롤 : 1차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한 영토 중 일부. 게르만 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더군다나 4월의 국민투표는 좀 강압적이긴 했어도 어쨌든 압도적인 지지로 독일과의 통합에 찬성하지 않았습니까? 베르사유 체제가 외치던 그 잘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히총통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명분까지 제공했죠.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독일군과 환영하는 오스트리아 인들
-그리고 그들은 몇 년 뒤부터 징병과 폭격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몇 년 뒤부터 징병과 폭격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유럽 국가들이 전혀 힘도 못쓰자 기세등등해진 히총통은 이번에는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로 눈을 돌립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와 급이 달라서, 국력도 나름 있었고, 프랑스와 직접 군사동맹을 맺은 동맹국이었습니다만 히총통은 독일인 비중이 높은 주테텐란드를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해서 독일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수법으로 체코를 갈궜죠.(...)
이번에 유럽-정확히는 영국과 프랑스-은 새로운 방법으로 독일을 압박하고자 하는데 이 새로운 방법은 바로 소련(...)과의 동맹이었습니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배제해오고 견제해 온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힘을 빌려 독일 동부에서 압력을 넣겠다는 생각이었죠. 35년에는 독일 재군비를 묵인해 소련을 견제하려 하고. 유럽판 이이제이랄까요.
여하튼, 소련과 협력만 잘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유럽의 집단안전보장체제는 작동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왜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을 끌어들여야 했는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그들이 소련을 끌어들이려던 이유는 체코 위기와 관련해서 독일을 적극 편들어 체코라는 케이크를 쪼개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두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었죠.
하나는 헝가리였고, 다른 하나는 무려 1921년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체결한 폴란드였습니다.-_-;;;; 발칸 및 중유럽의 복잡한 인종구성은 해당지역 국가들의 끝없는 영토분쟁을 유발했고 이는 체코슬로바키아도 마찬가지여서, 체코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와 헝가리는 독일이 주도적으로 체코 분할을 시도한다면 적극 참여해서 빵 부스러기라도 주워먹을 심산이었습니다. 헝가리는 체코의 루테니아 지방, 폴란드는 테셴 지방을 각각 노리고 있었죠.
특히 서유럽 세계는 1921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가 대승을 거둔 것을 본 이후로 폴란드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서유럽이 보기에는 체코위기때문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빌어먹을 독일은 물론이고, 소비에트를 캐바른 "군사강국 폴란드"까지 적으로 돌려야 했습니다.(서유럽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고 있던 군사강국 폴란드는 1939년 10월에 사라지죠 ㄳ)
거기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커지는 것도 싫었지만 소련이 커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대독전을 빌미로 소련이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것을 우려했습니다.-실제 2차대전 직후 동유럽은 소련이 통채로 접수했죠.- 특히 가장 우려하던 건 소련의 폴란드 침공.(...) 독일이 폴란드와 손잡고 체코위기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두려워한 영프는, 그 전쟁을 막기 위해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할 가능성 또한 두려워 했습니다.(...)
결론은 전쟁없이 평화로운 해결이었죠.(...) 더군다나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만큼 막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여론은 그럴 수 밖에 없는게, 3~50대 남성들은 대부분 1차대전때 참호전의 그 악몽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끔직한 전쟁을 몸소 체험한 그들이었길래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그런 지옥과도 같은 전쟁에 보내기 싫어했던 거죠.
그 결과, 히총통은 주테텐란드를 꿀걱합니다. 그걸로 부족해 히총통은 1939년 초에 아예 체코의 나머지 부분까지 꿀걱해 버립니다. 그제서야 런던과 파리는 히총통의 정체성을 깨닫고 캬오오옿!! 하며 전의를 불태우게 됩니다만 이미 늦은 일입니다. 이탈리아, 벨기에가 차례대로 이탈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멸한 1939년 기준으로 대 독일 포위망에 남아있는 건 영국, 프랑스, 폴란드 세 나라가 전부였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영프는 다시 한 번 소련과 동맹을 타진해 봅니다만 이 과정에서 오히려 소련의 의심만 부추깁니다.(*서유럽 세계가 소련과 전체주의 국가-독일, 일본-의 전쟁을 부추겨 양측을 모두 몰락시키려 할 것이라는 의심) 또,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때는 테셴이라는 빵부스러기를 맛있게 먹어치운 폴란드는 단치히 회랑이라는 꿀빵은 절대 안뺏기려고 발악하면서도 소련의 지원은 절대 거부했습니다. "내 차라리 독일에게 망하면 망했지 저 더러운 러시아 놈들의 손은 빌리지 않는다!"랄까요-_-;;
...이러는 와중에 독일과 소련 사이에 시작된 접촉은 급속도로 발전되더니 총통 각하와 대원수 동지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대인배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버립니다-_-;; 런던과 파리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메가톤급 망치로 얻어 맞았고 이제 전쟁을 막을 길은 없었습니다.
참고문헌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Alan John Percivale Taylor, 2003. 지식의풍경)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Richard Overy, 2003. 지식의풍경)
*리더스 다이제스트 - 20세기 대사건들 격동과 비약의 기록 (1985. 동아출판사)
*타임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타임라이프 북스 편집부, 1982.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히틀러의 30일 (Henry Ashby Jr, 2005. 수린재)
*위키피디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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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9/24 13:04 | History | 트랙백 | 덧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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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입장에선 최악이지만-ㅅ-
폴란드는 기존까지의 "영토 분할 사"에 이 가는건 사실 다들 알고 있지만, 독을 먹을때는 그릇까지 먹어치워야하는..것에 폴란드를 납득시키는것이 모자른것은 사실(너무 능력을 믿었으니...아니 독일을 과소 평가한걸지도)
정작 영프는 독일을 과대평가했지만-_-;;
1920년경에 내전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적군이 허약해졌다고 생각한 폴란드 수뇌부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해서 키에프를 점령합니다. 그 직후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지휘하는 5개군이 반격을 가해서 폴란드군을 몰아냈는데, 바르샤바로 가는 길목에서 피우수트스키원수가 지휘하는 폴란드군에게 저지를 당해서 다시 물러났죠. 1921년 3월 리가에서 조약이 체결되고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 일부를 할양받게 됩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라덴보스(!!!)님께 맡기겠습니다.
신생 독립국 폴란드의 영토적 야심 및 러시아에 대한 뿌리깊은 분노, 기타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 탄생에 경계를 갖고 있던 열강의 뿜뿌질 등이 겹치면서 폴란드가 소비에트를 침공하죠.
1919년부터 시작된 전쟁은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 전역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한때 키예프를 함락합니다만 내전을 마무리짓고 전력을 추스른 적군의 반격으로 패퇴해 오히려 수도 바르샤바를 위협당합니다.
그러나 이 소련군의 공세는 비스와 강 전역에서 폴란드 군의 역공으로 완전히 괴멸당하면서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소련의 역공은 완전히 무산됩니다. 이후 적백내전도 끝나고 소련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당황한 폴란드, 비스와 강의 패전에 충격을 입은 소련이 서로 타협하여 종전이 이루어지죠.
뭐 리비아의 어느 부족을 조져버릴때나 스페인 내전에서의 이탈리아군의 활약을 생각하면..... [먼 산]
이탈리아 군은 제1차 전쟁 당시와 수준이 달랐고 에티오피아 군은 큰 발전도 없었습니다. 투입전력 자체도 확실했고. 독가스를 퍼부어서 "겨우" 이긴 게 아니라 독가스 사용은 애시당초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기본적 교리 중 하나로 채택된 겁니다. 못이겨서 겨우 사용한 게 아니라 당연히 사용한 겁니다.-ㅅ-
때문에 독일 중심에서, 전쟁을 막지 못한 승전 연합국 중심으로 35년 이후의 외교사를 다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폴란드가 적극적인 협력의 각을 세워주지 않으면 소련의 개입은 물론 연랍국이 실제적으로 체코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이 없었으니깐요...ㄷㄷ
폴란드도 설마 히총통이 몇 달만에 단치히 회랑을 요구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34년 독풀 불가침조약을 맺은 장본인이 히총통이었으니까요.
여튼 폴란드때문에 영프와 소련의 연합 가능성이 차단되기도 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던 게 사실이죠.-_-;;;
[전권 위임도 안 받은 사람을 보내는건 무슨 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