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세계사 (7) -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History

제1차 세계대전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 존재하던 구시대적 전제국가들을 대거 붕괴시켰습니다. 짜르의 제정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붕괴되었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나 독일 제2제국도 결국 패전과 혁명으로 몰락했습니다. 또 다른 전제국가 오스만 투르크 역시 줄 잘못 선 죄로 붕괴되고 맙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독일 제2제국, 제정 러시아는 전쟁에 뛰어들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반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전쟁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세계최강 대영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독일과의 동맹과 전쟁을 결의했던 걸까요?



사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914년 7월 기준으로 결코 어느 특정진영의 편이라고 보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3B 정책으로 대표되는 독일 제2제국의 적극적인 진출책으로 독일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었습니다만 영국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거의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국-오스만의 유대 관계는 그 이후 러시아의 남하 시도를 막기 위한 영국의 국가전략이 오스만의 생존이라는 측면과 일치되면서 자연스레 발전, 강화됩니다. 크림전쟁에서는 직접 참전까지 했고, 이후 1877~78년 전쟁때도 군대를 보내 러시아의 추가진출을 견제했던 게 영국이죠.

그.러.나 이저 빌헬름 2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통제권을 자신의 제국, 그리고 제국의 지도자인 "자신이 쥐고 있다."고 과신했습니다.(먼산) 카이저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오스만에 파견된 독일 군사고문단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고 독일 군사고문단은 자기들이 보스포로스 해협의 해안요새 및 포대의 통제권을 쥐어야 한다고 주장, 오스만 군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얼마나 고압적이었는지, 독일 군사고문단장에 대한 오스만 군의 암살 시도가 모의된 적도 있더군요.(...)

특히 이 문제는 독일 군사고문단과 오스만의 신임 국방장관인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에디르네[Edirne]) 해방의 영웅 엔베르 파샤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표면화되고 고조되기에 이릅니다.(사실 아드리아노플 해방의 영웅이라고 합니다만 1차 발칸전쟁시 상실한 영토를 2차 발칸전쟁때 수복한 게 전부입니다. 그것도 불가리아 군이 그리스, 루마니아 세르비아를 상대하는 동안 텅 빈 뒷집을 털은 겁니다-_-;;)

오히려 오스만 제국 내의 세력 상당수는 독일을 두려워하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대표되는 삼국협상 진영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라예보 사건 이전인 1914년 5월, 탈라트 파샤(Talat Pasa)는 러시아에 임시 동맹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는 "이거 뭔가요? 먹는 건가요?" 반응이었습니다만;;

실제 당시 영국 및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 내에 미치는 영향력은 독일 못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오스만 공채 위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수도 및 지방 대도시, 항구 등지의 헌병대 조직 유지 및 근대화에 많은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오스만 정부가 파산할 경우 추가적인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고 영국과 함께 오스만의 금융권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해군 분야에서는 영국의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영국은 수십여 년 전부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 해군의 근대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여러 방면에서 협력했습니다. 77~78년 전쟁 당시만 해도 오스만 해군은 영국이 판매한 장갑함덕분에 러시아 흑해함대보다 전력상의 우위를 지니고 있었죠. 이 시기에도 영국의 지원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독일 군사고문단에 맞멎는 규모의 영국 군사고문단이 이스탄불에 상주하며 오스만 해군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들 고문단의 선의에 찬 소개 및 협력으로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게 최신예 전함 2척을 주문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영국 암스트롱, 빅커스 사는 오스만에서의 해군공창 계약을 따내기도 하고.

즉, 1914년 7월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어느 특정국가에 치우쳤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독일의 영향력이 크긴 했지만 절대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죠. 오히려 사라예보 사건 발생 이후인 1914년 7월, 오스만 제국은 비밀리에 프랑스 외무성을 통해 "합당한 대가가 있다면 유사시 삼국협상 쪽과 함께 대전에 뛰어들 수 있음"을 말하고 의사를 타진합니다. 프랑스는 이를 일단은 거절합니다.

그리고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침공을 개시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비공식적으로 동맹을 제안합니다. 이 동맹제안은 말이 많은데, 오스만 정부보다는 엔베르 파샤 등 일부 친독인사들에 의해 자행된 독단적 행위라는 설이 있습니다. 예, 오스만 제국은 이미 막장이었던 겁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
- 문제의 발단인 독/오스만 군사동맹의 제안자

사실 과거 독일은 오스만에 대해 군사적 동맹으로서의 가치가 전무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만 세계대전이 다가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오스만의 군대가 흑해에서 러시아의 보급로를 끊고 동시에 카프카스, 발칸에서 러시아와 충돌해준다면 설사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거였죠. 러시아의 통상교역에 심각한 타격이 될뿐더러 오스만과의 충돌은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받게 될 압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하루만에 오스만이 제안한 동맹안에 서명을 해서 다시 이스탄불로 보냈습니다.(-_-;;;)

8월 2일, 양국은 마침내 공식 군사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비공개에 붙여졌고 오스만의 일부 친독 동맹주도층 및 베를린의 똘기넘치는 카이저 및 일부 외무성 및 군 고위관계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 동맹은, 다만 무조건적인 공수동맹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러시아에 국한한 동맹이라고 오스만은 못을 박은 거죠. 오스만 내 친독파도 영국 및 프랑스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없었죠. 없었어요. 없었는데요. 없었는데 말입니다.

오스만이 독일에 동맹을 제의한 7월 28일. 대영제국 해군성 장관의 이름으로 영국은 오스만이 주문해 인도만을 기다리고 있던 최신예 전함 2척을 "징발"합니다. 이에 항의하며 승선해 오스만의 초승달 기를 게양하려던 오스만 해군 인수인원들은 강제로 쫓겨났습니다.

저 최신예 전함 2척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탈리아 및 발칸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뼈저리게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을 느끼며 전 국민적 성금-을 빙자한 강압적인 돈걷기-을 걷어서 영국 군사고문단의 제의 및 조언을 받고 그들의 알선을 받아 주문한 거였습니다. 약 35년 후 동북아의 어느 신생독립국에서도 해군 가족들이 성금을 모아 배를 사긴 했습니다만 퇴역해서 남아도는 쪽배 1척 사는 거랑, 아예 최신예 신조전함 2척을 주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죠.

실제 저 전함 2척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기대가 매우 컸던 와중에 영국 해군성은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을 명분삼으며 저 전함 2척을 징발한 겁니다. 이미 취역 준비까지 다 했고, 대금지불 완료되었고, 인수만 하면 되는 상황, 즉 즉응투입 가능한 전함 2척을 강탈한 겁니다.

이렇게 강탈당한 술탄 오스만 1세, 레사디예 2척은 각각 HMS Agincourt,  HMS Erin의 함명을 부여받고 대영제국 해군에 편입됩니다.




문제의 전함 HMS Agincourt
-
 오스만의 반영감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폭발한다.

당연히 저 2척의 전함을 구매하기 위해 거금을 쏟아부은 술탄 이하 전 오스만 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습니다. 친영파는 경악해서 할 말을 잃었고, 친독파도 친독파 나름대로 당황했습니다. 왜냐? 아무리 친독파래도 영국과 전쟁할 마음은 없었거든요. 진정 세계최강, 전 대양의 지배자 대영제국과 전쟁하면 나라 쫄딱 망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인데 누가 영국하고 전쟁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너무 악화되어서 영국과 일전불사 소리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불난 집에 기름 붓는다고, 독일은 얼씨구나 하고 주요 신문을 매수해서 열심히 영국을 까대기에 바빴습니다.(매수 안해도 까댔을 겁니다만;;) 오히려 합리적(?)인 오스만 제국 정부에서는 영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국의 전함 강탈 행위에 대해 "합당한 보상"과 사과를 받아내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부 내의 기류를 읽어낸 이스탄불의 영국 대사는 이에 호응하고자 본국의 어느 빌어먹을 해군성 장관에게 오스만에 대한 보상을 통해 중립을 지키도록 강구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해군성 장관이 누구입니까? 30년 뒤 총통 각하, 대원수 동지와 함께 천하를 판돈 삼으며 포커를 치시던 대인배 of 대인배 윈스턴 처칠이셨던 겁니다.(...) 사실 대인배가 아닌 이상 누가 전함을 강탈하는 날강도짓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스탄불 대사의 요구에 대해 윈스턴 처칠은 엔베르 파샤 오스만 국방장관에게 비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사를 타진합니다.

대영제국 자유당 내각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
(오스만이 중립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1일 천파운드씩을 매주 지급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친독 성향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이를 거부합니다. 날강도처럼 전함을 먼저 뺏어간 주제에 선심쓰듯 전제조건씩이나 달며 1주일에 7천파운드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은 엔베르의 자존심을 팍팍 긁어먹는 행위였습니다. 1년 임대료라 해야 364,000파운드. 2척의 전함을 구입한 가격, 그리고 영국에 전함 2척을 "임대"하는 기간동안의 국가 방위력 문제 등을 생각해볼때 엔베르는 좋은 조건이 절대 아니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러한 결정에는, 제안 며칠 전인 8월 10일. 영국 지중해함대의 추격을 받던 독일 해군 괴벤과 브레슬라우가 오스만 제국 영내로 쫓겨 도망간 뒤, 베를린이 이 2척의 군함을 오스만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도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영국은 전함 강탈해가는데 독일은 방위력 개선을 위해 전함을 보내준다."는 식의 여론이 형성된 겁니다. 물론 주요 신문은 여전히 독일에서 보낸 거금에 매수된 상태였죠-_-;;

SMS Goeben - 터키 해군이 계속 운용하다 1973년 퇴역, 1976년 해체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지경이 되어도 오스만은 참전할 생각따위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영국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지만 여전히 정부는 합리적으로 작동 및 판단하고 있었고, 오스만 정부는 괴벤 및 브레슬라우를 양도받은 이후에도 동맹 체결에 따른 선전포고를 전혀 하지 않으며, 연합국들에게 중립 보장을 요구하며 몸값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참전시 당장 최대 해상교통로가 마비되는 러시아는 오스만에 대한 영토적 보장 및 전후 금전적 보상을 할 용의가 있음을 드러냈고, 프랑스가 이에 동의합니다만 영국 본국 정부는 대인배 of 대인배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아주 말아먹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스만 따위 무시하고 괴벤, 브레슬라우를 추격해 격침시키자고 주장했는데, 오스만의 중립 보장따위에 대해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거죠. 이 무렵 영국 정부는 사실상 오스만을 독일 진영으로 판단한 겁니다.

실제 아직 오스만이 참전하지도 않은 9월 초, 육군성 장관 키치너, 해군성 장관 처칠 등이 모여서 대 오스만 전쟁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주로 제해권에 기반을 둔 다르다넬스-보스포로스 해협 통제 작전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갈리폴리 반도로의 상륙전(...)이 논의되었죠. 이윽고 9월 9일, 이스탄불의 영국 해군무관단이 몰타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수에즈운하를 둘러싼 이집트 및 동지중해의 거점 키프로스를 이미 차지한 상태의 영국은 오스만을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겁니다.

이쯤 되다 보니 오스만도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8~9월에 걸친 서부전선의 연합국 대참패(마른에서 격퇴하긴 하지만;;)와 동부전선에서 있었던 탄넨베르크 회전의 고무된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스만의 최대 위협인 러시아는 탄넨베르크의 패배로 오스만에 공세를 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된 겁니다. 더군다나 9월 22일, U-9에 의한 영국순양함 3척 격침사건으로 영국 해군이 독일에 집중될 거라는 기대도 한 몫 했죠.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유로 오스만과 연합국의 교섭은 진행되기 어려워집니다. 오스만 해군에게 매각되었다지만 괴벤과 브레슬라우는 여전히 독일 해군이 운용하고 있었고 이들은 골든 홀에서 정박한 채 언제든지 이스탄불 시가지를 포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주요 관공서와 종교시설, 심지어 술탄의 궁전까지도.(...) 연합국은 자신들의 무관단 철수는 오스만의 중립을 위한 조치라며 같은 이유로 독일 무관단을 추방하라고 요구합니다만 오스만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바로 오스만의 최고위층 숨통을 노리고 있었던 거죠.

9월 27일, 오스만의 어뢰정 1척이 에게해를 순찰하려는 것을 영국 해군이 저지해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오스만은 이를 계기로 해협을 폐쇄하고 기뢰를 부설하여 에게해 및 흑해의 수운에 결정적 타격을 가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오스만은 참전할 생각은 없었고 연합국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중립을 보장받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설사 참전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러시아에 국한된 전쟁만을 생각했죠.

때문에 10월 21일, 빌헬름 2세가 오스만이 참전할 경우 2억 마르크를 바로 오스만의 국고에 귀속시키겠다는 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참전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 독일은 최후수단을 사용하여 오스만을 강제로 참전시키기 위한 조치에 들어갑니다.

10월 28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 해군 함대가 러시아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Yabuz Sultan Selim)과 경순양함 미딜리(Midilli)를 중심으로 하고 일부 소형함정이 엄호하는 오스만 함대는 흑해 연안의 주요 항구-오데사, 셰바스토폴 등-에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하고 항행 중인 상선을 나포하며, 케르치 해협에 기뢰를 부설하는 등의 작전을 벌입니다.

Wilhelm Souchon 제독- 1914년 10월 흑해작전을 이끈 독일 해군 지휘관

문제는 이 시기 오스만은 선전포고를 안 했단 거죠. 그럼 대체 누구냐... 당연히 독일입니다. 야부스 술탄 셀림과 미딜리는 각각 괴벤과 브레슬라우가 오스만에게 매각된 뒤의 함명이었고 여전히 승무원들과 사령관은 다 독일인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해군이었지만 사실상 베를린의 명령을 받고 있던 이들은 전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겁니다.

이제 연합국은 더 이상 참지 않아, 러시아가 오스만에 최후통첩을 했고 오스만 정부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했던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도, 러시아가 양국에 대 오스만 전쟁을 요구하면서 희망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11월 1일,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11월 2일,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하면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세계대전에 발을 내딛은 또 하나의 대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여담 1. 11월 11일 오스만 제국 술탄 겸 칼리프 메호메드 5세는 연합국 국가들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합니다.(이슬람 율법상 지하드의 선포 권한은 어디까지나 칼리프에게만 있습니다. 칼리프가 없는 지금은 뭐 아무나 지하드를 선포합니다만;; 방어적 입장의 지하드 선포권한은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더군요.) 1911년 이탈리아와의 리비아 전쟁을 통해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 교도들의 봉기를 경험한 오스만 제국은 지하드 선포로 러시아가 코카서스에서 대혼란에 빠지고, 영국은 인도를 잃게 될 것이라 낙관합니다.

정작, 지하드에 호응한 건 이집트 총독 뿐이었고 몇 시간만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쫓겨납니다만(먼산) 1911년 전쟁 당시 리비아에서의 호응은 침략자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1차대전의 지하드 선포는 성격이 많이 달랐죠-_-;;

여담 2. 괴벤 및 브레슬라우의 입항을 받아들였다가 사실상 이스탄불과 정부 전체가 독일의 인질이 된 경험은 무스타프 케말 파샤가 수도를 앙카라로 옮기는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이스탄불은 더 이상 수도로 삼기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너무 취약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 거죠.

여담 3. 오스만 해군의 전함 2척을 강탈하고 오스만의 중립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대인배 of 대인배 윈스턴 처칠은 26년 후에는 터키가 독일편을 들어 참전할까봐 우려워하며 중립유지 내지 연합국에 가담시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게 됩니다. 1차대전때와 달리 연합국은 영국 달랑 혼자 남아있었고, 본토가 폭격받고 지중해에서 이집트가 위협받는 와중에 터키가 참전하면 중동의 뒤통수가 날아갈 수 있었거든요(...) 이래서 세상 일은 모르는 겁니다-_-;;



참고문헌
오스만 제국사 (도널드 쿼터트, 사계절. 2008)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앨런 파머, 에디터. 2008)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만, 평민사. 2008)
위키피디아(-_-;;) 및 인터넷 전반(...)

덧글

  • 레인 2008/10/02 11:27 # 답글

    모든건 대인배 of 대인배 첩7명의 주인 때문이었군요 -_-;
  • Ladenijoa 2008/10/02 16:10 #

    모든 건...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원인 제공자 2명 중 하나로서의 책임은 명백히 존재하죠. 여론 악화시킨 크리는 진짜...
  • 史記 2008/10/02 11:44 # 답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 Ladenijoa 2008/10/02 16:10 #

    감사합니다^^
  • 슈타인호프 2008/10/02 11:52 # 답글

    꽤 복잡했군요. 대부분의 국내 책들은 친독파의 활동만 서술해서 터키 전체가 반영 감정을 가진 것처럼 적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 Ladenijoa 2008/10/02 16:15 #

    사실 대부분 처칠의 전함 압류사건 이후 반영감정 득세와 독일의 전함선물 이후 친독감정 강화라는 거대한 이벤트만 보고, 오스만 정부의 주 구성원이나 결정과정 등까지는 생각이 안 미치더군요.

    사실 오스만 제국이 왜 동맹을 맺고 3달이나 지난 뒤에야 전쟁에 참전했는지 이 의문 하나만 가졌어도...;;;
  • 저거노트 2008/10/02 12:19 # 답글

    헐... 윈스턴 처칠 참 대단하군요.
  • Ladenijoa 2008/10/02 16:16 #

    처칠 경이 좀 혈기가 넘치시죠-_-;;

    덕분에 30년대 초 정계복귀 때에도 이단아 내지 미친 놈, 과격분자 취급 받았습니다(먼산)
  • 행인1 2008/10/02 12:56 # 답글

    처칠경께서 적국 하나를 만드셨군요...-_-;; 결국엔 그 때문에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 Ladenijoa 2008/10/02 16:17 #

    과연 처칠이 적국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본문에도 적혀 있지만 오스만은 전함 압류사건 이후에도 3달 가까이 전쟁 참가를 안 하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오스만 참전을 위한 여론 조성의 역할이 클 뿐이죠.

    그리고 처칠의 해군경 사직은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때문이지 오스만의 참전은 아닙니다-ㅅ-
  • 월광토끼 2008/10/02 13:46 # 답글

    결국 이리하여 갈리폴리에서 수많은 젊은 호주와 뉴질랜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멜 깁슨도 친구를 잃었습니다. :)
  • Ladenijoa 2008/10/02 16:18 #

    오스만 아니더라도 어차피 서부전선에서 돌격하다 기관총에 죽었을 겁니다. 좀 더 유의미있게 말이죠 ㅋㅋ
  • 윙후사르 2008/10/02 14:08 # 삭제 답글

    결국은 처칠탓인건가요... 하기사 아무리 약해빠진 나라여도 남의 나라 군함을 멋대로 강탈하면... 열불나긴 할겁니다.
  • Ladenijoa 2008/10/02 16:18 #

    처칠 탓이라기보단 처칠이 상황 조성하고 그 상황에서 카이저 빌헬름과 독일이 오스만을 긍지로 밀고 갔습니다.
  • 들꽃향기 2008/10/02 17:27 # 삭제 답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그런데 전쟁선포 후에도 독-투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독일측 고문관들은 터키군을 멸시했고, 터키군은 또 독일군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는 경우가 상당,.ㄷㄷ

    오죽하면 쿠트 알마이라 전투에서 영국군의 메소포타미아 파견대와 터키군이 교전하던 당시, 독일군 파견참모가 병사했는데 당시 청년 투르크당의 열성 당원들이 독살했을 거라는 소문도 떠돌 정도로 분위기가 흉흉했으니..-_-;;

    이런 터키를 연합국측이 잃게 된 것은 님의 말씀대로 처칠의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처칠 자체가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특히 종래의 군함외교식 발상에 근거한 오스만에 대한 멸시는 나중에 갈리폴리 전투에서도 이어져 수많은 희생을 낳는 원인이 되었으니..=_=;
  • Ladenijoa 2008/10/02 19:17 #

    쿨럭, 전쟁 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역시 독일 제2제국의 선민의식은 너무 심각하게 문제입니다;;

    진짜 처칠의 구시대적 오스만 사고에 입각한 그 정책에는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1941, 42년에 그 처칠이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터키가 꾸욱 참고 중립을 지킨게 용하달까요-_-;;
  • 날아라슝 2008/10/02 19:00 # 삭제 답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왜 글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출처라던가 인용한 자료를 안밝히고 포스팅을 하시는지 ... 안타까워요 ㅠㅠ
    인용한 자료나 출처를 밝혀주고 이글을 일고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원문을 찿아가게 만드는 길잡이 역활을 해주세요^^
  • Ladenijoa 2008/10/02 19:18 #

    어익후, 지적 감사합니다.
    잠시 뒤 원문수정해서 참고문헌 덧붙이도록 합죠^^
  • 【天指花郞】 2008/10/02 19:12 # 답글

    참 고놈의 배 오래도 쓰는구랴. 정비하느라 죽어나갔을 터키해군 갑판병들에게 애도를....
  • Ladenijoa 2008/10/02 19:19 #

    터키 해군에겐 최강의 주력함이었으니 당연하잖솧 ㅋㅋ
  • 【天指花郞】 2008/10/02 19:22 #

    저거 유지비 댈 바에야 차라리 쓸만한 프리깃 두어 척 사는 게 훨씬 나을것 같은데....(1년에 들어가는 철판 값만 해도 ㅎㄷㄷ;;;) 하긴 윗동네에 소씨가 버티고 있으니 안 되나 -_-;;
  • FELIX 2008/10/02 19:54 # 답글

    일단 잘읽었다는 리플하나 남깁니다.
  • Ladenijoa 2008/10/03 21:32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메낚 2008/11/03 10:11 # 삭제 답글

    어차피 머지 않아 합스부르크 제국, 제정 러시아와 함께 역사의 부스러기가 되어 날아 갈 노 제국..... 뭐, 오라클 햏녀의 말씀 대로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지요. 30년 전쟁 이후 서양사의 다이너마이트 핵폭발이었던 1차 세계대전에 오스만 제국이 휘말려서 공중 분해 되는건 결국 역사의 필연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의 부흥 이후로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양대 제국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지요. 근대 까지만 해도 동유럽과 발칸 반도를 두고 서로 문자 그대로 문명의 충돌을 하던 두 다민족 거대 신정 제국들이 막상 망할때는 같은 이유로, 같은 시기에, 같은 편에서 사이 좋게 망했다는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 Ladenijoa 2008/11/03 11:53 #

    언젠가 붕괴될 나라이긴 했지만 1차대전은 구체제를 조기에 일소시키는 역할이었죠. 오스만을 좀 좋아하는 저로선 아쉬운(...)
  • ㄱㄷㄱㅈ 2018/09/10 20:54 # 삭제 답글

    다만 오스만도 칼리프긴 했습니다


    맘루크의 보호국이었던 아바스를 멸망시켰으니까요(1517)
  • ㄱㄷㄱㅈ 2018/09/10 20:59 # 삭제 답글

    그이후 칼리프직을 아바스로부터 선양받은 이후 칼리프가 되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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