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세계사 (13) -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길 History

한 달 전에, 유럽에서 동양으로 가는 지름길 찾기라는 제목으로 아무거나 세계사 시리즈의 두 번째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로턴 체스니 대령의 삽질에서부터 레셉스의 수에즈 운하에 이르는 이야기였는데, 그 때부터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포스팅을 하려고 마음먹게 되었죠. 그리고 이제서야 이렇게 포스팅을 올리게 됩니다.


역사상 유럽인들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려하는 시도는 15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그 때즘이면 서회항로를 통해 발견한 땅이 후추가 쏟아져나오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 서쪽 대서양 건너의 그동안 모르고 있던 신대륙이란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고, 스페인 제국은 포르투갈이 독점한 아프리카 남단 항로 대신 서회항로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됩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Vasco Núñez de Balboa는 파나마 지협의 북단에서 출발, 곧 지협 남단에 도착하여 태평양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나마 지협의 발견이죠. 아울러 유럽인 중에선 처음으로 태평양이라는 바다를 본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보고를 접한 스페인 제국의 카를로스 5세는 해당 지협에 운하를 뚫을 수 없는지 타당성 검토를 위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아이디어는 내가 제출했다고

그러나 아무리 날고 기는 대 스페인 제국 및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 해도 파나마 운하를 뚫으려 하다간 국고를 말아먹고 제국을 붕괴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동네 험한 건 400년 뒤 레셉스가 아주 뼈저리게 체감하죠. 스페인의 운하 건설 계획은 이로서 중단됩니다. 이후로도 스페인은 지속적으로 운하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습니다.

1518년, 스페인은 다른 이유로 태평양에 첫 탐험대를 보냅니다. 바로 마젤란 선단인데, 마젤란 선단의 목적은 1493년 교황의 중재로 포르투갈과 맺은 토르데실라스 조약(
Tratado de Tordesilhas)에 근거, 향료제도로 알려진 몰루카 제도의 스페인 영유권 주장을 위한 증거를 확보하고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찾는 거였습니다.

마젤란 선단은 갖은 고생 끝에 브라질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출구를 발견하고 올라갑니다만 사실은 강이었다 파문.(라플라타 강) 마젤란 선단은 다시 강을 내려와 쭈욱 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1519년 10월 21일 해협의 대서양 입구를 발견하고 한 달이 좀 넘게 걸린 11월 28일 해협의 출구에 도달합니다. 배를 타고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처음 진입한 역사적인 순간이죠. 뭐, 그 마젤란 선단이 어떤 꼴 당했는지는 유명한 이야기니 여기서는 패스하겠습니다.

배를 타고 처음으로 태평양에 간 사나이
그리고 필리핀에서 장렬히 (약탈하다) 사망

한편, 1578년 영국의 해적선단 두목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역시 마젤란 해협을 이용해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을 탐험(약탈-_-)하다 저 멀리 캐나다 서해안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한 북서항로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스페인 제국의 황금선단 및 식민지 약탈에 치중하다 태평양을 횡단해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대신 그는 항해 초기에 마젤란 해협 남쪽에 있는 또 다른 해협을 발견합니다.(해협이라기엔 좀 폭이 넓지만-_-) 이것이 드레이크 해협이죠. 정작 자신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만-ㅅ-

붉은색 : 마젤란의 항로
푸른색 : 드레이크의 항로

한편,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려는 항로를 착기 위한 시도는 북쪽에서도 있었습니다. 드레이크가 찾고자 한 북서항로인데, 이건 뭐 말을 말아야죠(...) 영국의 항해가 존 캐벗을 시작으로 한 북서항로 개척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엄청난 악조건 속에 조난, 실종, 선상반란 등이 잇달아 벌어졌고 북서항로 개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입니다.(세계지도 열심히 보신 분이라면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일 겁니다.) 그는 1607년과 1609년에 걸쳐 북서항로를 탐사했고, 그 결과 어느 해협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지금의 허드슨 해협) 그는 이 해협의 출구에 도달하면 북서항로의 개척과 태평양 도달이라는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영국 동인도회사 등지에서 투자자를 모아 1610년 제3차 항해를 떠납니다만...

결국 그는 허드슨 해협을 통과한 뒤에도 자신이 태평양이라 철썩같이 믿었던 바다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그 혹한지에서 겨울을 나다가 선상반란을 당해 바다에 버려졌습니다.-_-;;; 그리고 후대인들은 그가 태평양이라 믿었던 바다는...

붉은 색 원 : 허드슨이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이라 생각한 해협. 허드슨 해협
검은 색 원 : 허드슨이 태평양이라 생각한 바다. 허드슨 만
갈색 별 : 허드슨이 선상반란을 당해 버려진 곳.
붉은 색 선 : 허드슨의 제3차 북서항로 항해도. 그는 태평양(허드슨만)을 열심히 탐사했으나 출구를 찾지 못했다.

이후로 북서항로 개척시도는 조난과 선상반란, 기아, 괴혈병, 혹한, 원주민과의 싸움, 폭풍, 빙산충돌 등 온갖 장애를 겪으며 사실상 실패했고 19세기 후반부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집니다만 탐험적 성격으로서의 개척만 성공했지 실제 사용 가능한 항로로 발달되지는 못합니다.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보죠. 스페인 제국은 17세기부터 국력이 점차 쇠퇴하여 운하에 대한 높은 관심과 반비례로 운하건설을 위한 국력은 바닥을 드러내며 사실상 포기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더군다나 스페인 식민제국이 모두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더 이상 중남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파나마 지협은 신생 독립국 콜롬비아의 영역이 됩니다. 대신 태평양으로 가는 길은 미국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합니다.

루이지애나 매입과 멕시코 전쟁의 승리로 대서양 연안국에서 태평양까지 그 영토를 광활하게 넓힌 미국은 양대양을 접한 대국이 되었습니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로 인해 서부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1860년대, 남북전쟁 종결 이후에는 유니언 퍼시픽, 센트럴 퍼시픽 두 회사에 이에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됩니다.(1869)

그러나 중요한 건 역시 항로입니다. 현시전력이자 가장 중요한 전력인 해군을 위해서도, 그리고 양 대양간의 활발한 통상을 위해서도 항로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은 일찌감치 파나마 지협의 중요성을 깨닫고 1855년 지협 횡단 철도를 건설했지만 중요한 건 역시 해군이었죠.

한편 여기서, 미국과 관계없이 프랑스에서 파나마 지협 운하건설을 위한 회의가 열립니다.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나폴레옹의 종손(이 집안도 운하랑 참 연관이 깊어요.)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위스는 2년여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의 허가를 받은 뒤 이를 논하기 위해 회의를 요청한 거죠. 1879년 5월, 파리 지리학 협회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는 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 분의 제창하에 파나마 운하 건설, 그리고 운하를 수면식으로 지을 것이 결의됩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운하왕 레셉스

수에즈 운하 건설을 진두지휘해 결국 완공시킨 이 집념의 사나이, 운하왕 레셉스는 운하건설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와 있었고 그 누구도 레셉스의 주장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라 파나마 운하 회사가 설립되고 본격적인 운하 건설 공사에 착수합니다만...

우선적으로 카리브 해와 태평양 쪽의 해수면 높이가 달라서 수면식 운하를 짓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지형도 참 괴악했죠. 그냥 사막이던 수에즈와 차원이 달랐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열대정글우림. 이런 동네 하면 늘 사람들을 반겨주는 존재가 있죠.



모기떼의 습격으로 황열병, 말라리아 등 온갖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의 떼거지로 죽어나가게 됩니다. 운하건설기간 중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만 2만여 명. 이를 두려워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거부하기도 하고 회사를 뛰쳐나오기도 했죠. 자연스레 인건비도 올라갔고, 지형 및 해수면 차이 문제 등으로 인한 악조건 때문에 공사비는 천정부지로 솟구쳤습니다. 덤으로 홍수와 산사태는 기본 옵션이었죠. 가장 중요한 건, 수에즈 운하 건설 때와 달리 프랑스에 저런 대규모 공사를 지원할 뚝심을 가진 허영심 많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 그리고 프랑스에게 있어 파나마 운하의 필요성이 낮다는 거겠습니다만.

결국 레셉스는 부족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복권회사를 설립, 복권을 발행했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이 과정에서 복권발행을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쓴 혐의가 포착되어 감옥에 들어갑니다. 운하왕의 말로는 참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파나마 운하 회사는 파산하고 운하건설현장은 방치됩니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서는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체감하게 해주는 일이 생겼으니, 스페인과 전쟁이 터진 겁니다. 1898년 터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은 쿠바를 공격함과 동시에 태평양 방면의 필리핀까지 공략해야 했습니다. 즉 양 대양에서의 양면전쟁에 직면한 겁니다. 물론 다 늙어 쓰러져 죽기 일보직전인 노쇠한 제국 스페인도 양면전쟁의 여력은 전무했으니 비교적 전쟁은 쉽게 이겼습니다만.

여튼 이 전쟁으로 미국은 서태평양에 필리핀이라는 지역을 새로이 확보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대서양-태평양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울러 미국의 국가전략 및 안보구상도 커다란 변화를 갖게 되는데, 현 상태의 미국 해군으로는 도저히 양 대양에 모두 충분한 해군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미 해군은 양 대양에서 작전하려면 남쪽의 드레이크 해협까지 갔다가 와야 했던 거죠. 이 문제때문에 미국은 필리핀을 제외한 스페인령의 태평양 도서 일부를 독일에게 넘겨줘야 했던 거고요.

미국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 제국과 대서양에서 전쟁을 치루고, 태평양에서는 신흥국가 일본의 해군과 상대해야 한다는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되고 일본이 해군력을 급속도로 증강하자 이런 우려는 더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미 해군에게 전략적인 기동성을 부여하는 것, 즉 양 대양간 이동거리를 대폭 단축시키는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니카라과와 파나마로 압축된 운하 건설 후보지 중 미국은 파나마를 선택합니다. 파나마는 당시 콜롬비아의 영토였죠.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는 일시불로 1,000만 달러 지불, 매년 임대료 25만 달러 지불, 운하 및 10km의 운하지대에 대한 100년간의 권리 부여를 골자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지만 콜롬비아 의회가 미국이 제시한 운하건설과 관련된 협정의 비준을 거부하고 돈을 더 내라고 버팁니다. 그러자 미국은 아예 파나마를 분리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자는 계획 하에, 미국은 파나마 인들의 분리 폭동을 조장한 뒤 해병대를 급파, 콜롬비아 군의 진입을 저지합니다.

그 이후 신생 독립국 파나마의 정부로부터 운하건설 및 주변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받아냅니다. 헤이-부나우-바빌라 조약으로 일컫어지는 이 조약으로 미국은 운하 및 운하지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확보합니다.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결심과 의회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1904년부터 재개된 운하 공사는, 존 스티븐스(John Frank Stevens)에 의해, 레셉스의 수면식이 아닌 갑문식으로 설계가 전면 변경됩니다. 이는 카리브 해와 태평양의 해수면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게 했을 뿐더러 최악의 지형조건 속에서 공사의 난이도를 대폭 낮추었고, 호수를 이용하여 실제 공사거리를 크게 단축시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뒤이어 윌리엄 고거스(William Crawford Gorgas)가 등장합니다. 미국-스페인 전쟁 때 쿠바전역에서 종군한 바 있던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서는 모기 박멸을 통한 전염병 예방이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안타깝게도 40년 뒤 남태평양에서처럼 톤 단위로 폭격을 해대며 모기를 박멸시킨 1등 공신 DDT가 없었습니다. 대신 고거스는 파나마 지협 주변의 습지란 습지, 웅덩이란 웅덩이마다 기름을 마구잡이로 살포했습니다.(...) 두터운 기름층에 막힌 모기의 유충들은 대부분 나오지 못하고 장렬히 박멸당했죠.

이런 이점 말고도 미국에게는 또 다른 이점이 있었는데, 30년 전 먼저 운하를 파다 파산하고 가버린 프랑스의 유산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수많은 돈과 인명피해만을 날린 채 가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역에서 굴착작업을 해놓았고 철도를 부설했으며, 수많은 조사 내용 및 계획, 공사현황 등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미국으로선 정말 커다란 도움이었습니다.

파나마 철도가 복선화되고, 스티븐스의 후임자 조지 고서스(George Washington Goethals)가 적극적으로 독려한 끝에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파나마 운하가 개통됩니다.

 운하 건설의 책임자
 좌측 : 존 F.스티븐스
(John Frank Stevens)
 우측 :  조지 W.고서스
(George Washington Goethals)

 스티븐스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수송시스템 마련 및 운하의 설계, 특히 갑문식으로 가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고서스는 스티븐스가 남겨놓은 유산을 잘 활용하여 파나마 운하 건설을 마무리했다.


윌리엄 고거스(William Crawford Gorgas)
그의 모기박멸책으로 1906년 80%가 넘던 환자 발생율이 몇 년 뒤에는 12%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후 파나마 운하는 미국의 해군 전략을 위해서도 유용했을 뿐더러, 대서양과 태평양 양 대양의 물류 및 통상, 교역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파나마 침공 당시 전투 중인 미군

한편으로는 파나마의 군부지도자이자 사실상의 통치자였던 노리에가와 파나마 운하 권리에 대한 반환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자 미국은 Operation Just Cause를 전격 실시(1989. 12. 20)하여 노리에가를 체포하고 파나마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고히하기도 했습니다. 뭐 이 침공은 파나마 운하 문제만 걸렸던 건 아닙니다만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도 이유 중의 하나였죠.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은 블랙코미디 영화인 파나마의 재단사에서도 나옵니다 데굴데굴)

2000년에 파나마 운하에 대한 모든 권리는 파나마 정부에게로 반환되었고, 파나마 정부는 파나마 운하의 확대 및 제2파나마 운하를 구상중입니다.

덧글

  • 레인 2008/10/20 16:55 # 답글

    운하는 좋은것(...)
  • Ladenijoa 2008/10/20 20:49 #

    철도 이전까진 운하가 솔직히 대안인 건 맞으니까요. 저런 대양을 연결하는 운하는 현재로도 필요한 건 사실이고.

    대운하는 제발 좀이지만;;
  • OTIKA 2008/10/20 17:40 # 답글

    대항*시대 시리즈 하다보면 파나마, 수에즈 운하가 얼마나 편한지 체감하게 되죠(...)
    거기서도 북동항로는 그럭저럭 되지만 북서항로 통과 난이도는 그저 ㄷㄷㄷ이었던 기억이..
  • Ladenijoa 2008/10/20 20:49 #

    북서항로... 대항해시대3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_-;;
  • 윙후사르 2008/10/20 18:12 # 삭제 답글

    확실히 파나마나 수에즈운하같이 필요한 운하도 있지만... 물론 대운하는 아님.
  • Ladenijoa 2008/10/20 20:50 #

    대운하는 필요성이 전무하죠
  • azurebird 2008/10/20 18:30 # 답글

    프랑스는 남 좋은 일만 하는군요.
  • Ladenijoa 2008/10/20 20:51 #

    프랑스덕분에 진짜 미국이 공기 몇 년은 단축했죠. 삽질 한 번 안 하고 해당지역에 대한 주요 데이터 및 기록을 고스란히 얻일 수 있었고...

    그렇게 노력하고도 운하 완성 못 시킨 프랑스가 안습이긴 합니다.;;
  • 하늘이 2008/10/20 19:22 # 답글

    문제는 이걸 본 동아시아 모국의 어떤 정치인이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에 운하를 뚫는다는 엉뚱한 발상을 하고 있다는 것. 데굴데굴
  • Ladenijoa 2008/10/20 20:51 #

    그런 바보를 누가 말리겠습니까 엉엉
  • 소시민 2008/10/20 19:53 # 답글

    카를로스 1세의 경우는 교황을 잘 꼬드겨셔 면벌부 판매 수입으로 운하를 건

    설할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지도.... 농담이고요. 정말 허드슨과 같이 반란으

    로 오지에 버려지는 건 끔찍한 일이네요.

    마젤란 선단은 다시 강을 내려와 쭈욱 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1950년 10월 21일 해협의 대서양 입구를 발견하고 한 달이 좀 넘게 걸린 11월 28일 해협의 출구에 도달합니다.

    위 문단의 1950년은 오타인것 같네요.
  • Ladenijoa 2008/10/20 20:52 #

    오지에 버려지는 건 진짜 끔찍하죠. 당시 허드슨과 그의 아들, 허드슨 편의 선원 등 총 7명이 버려져서 이후 행방불명되었는데 얼마 못 가서 아사 내지 동사했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_-;;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1519년이라고 쓰려는 게 왜 저렇게 씌여졌는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 황제 2008/12/11 03:47 # 답글

    바다를 가르고 운하를 판다!!!
  • Ladenijoa 2008/12/11 15:26 #

    과연!!
  • 마레아알타 2010/08/25 01:48 # 삭제 답글

    파나마운하에 대한 자료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자료 찾고, 정리하느라 수고많으셨네요.
    정말 진짜, 내가 원하는 그런 정보에, 재미있는 설명이라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복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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