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세계사 (14) -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과정 History

1. 배경 : 프랑스는 왜 베트남을 노렸나?
프랑스는 비교적 오래 전부터 베트남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초반부터 베트남에 카톨릭 선교사를 보내어 포교를 시작한 게 그 기원입니다. 직접적 개입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는데 1787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와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가 맺은 베르사유 조약은 응우옌 왕조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명기하고 있었습니다. 곧 이어 혁명이 터지면서 실현은 안 됩니다. (단 응우옌 왕조는 일부 프랑스 주교 및 장교들의 개인적은 도움은 얻었고, 이 때문에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여 동양 식민지 확보를 꾀하였으나 뒤이어 직면한 혁명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혁명의 혼란기와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패전과 정치변동의 혼란 속데 프랑스는 베트남 문제에 당분간 손을 떼게 됩니다. 포교 및 교역 활동만 존재할 뿐이었죠.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지속된 아편전쟁과, 그 결과인 난징조약의 체결은 유럽 열강의 동양 진출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유럽 열강은 동양과 자주 왕래하기는 했으나 진출이 아닌 말 그대로의 탐험 내지 무역 활동의 일환이었으며, 이른바 진출이라 부를만한 것은 영국의 인도 및 말레이 반도 통치와 네덜란드의 동인도제도 지배,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었고, 현 동북아시아 지역은 꿈도 못꿨습니다.

16세기 경에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을 지배한 적이 있지만 그마저도 중국 세력, 그것도 중앙정부가 아니라 일개 반란군 집단에게 참패하여 축출된 전력이 있죠. 그 반란군 집단인 정씨 왕조는 유럽 열강과 대등한 상태에서 조약을 맺을 정도였고,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필리핀 침공 계획도 구상한 적이 있었으니 유럽이 중국 세력에게 얼마나 얕보였는지 알 만 하죠.

그런 상황 속에서 동남아시아가 아닌, 중국 왕조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여 영토를 획득하고 개항을 강요했으며 전쟁배상금을 물게 했다는 것은 영국이 동양, 특히 중국 진출에 있어서 제일 먼저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는 의미였으며 중국이 생각보다 의외로 약하다는 인식을 낳게 됩니다. 영국 못지 않게 동양 진출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로서는 다른 방면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합니다.

프랑스의 중국 진출 야욕은 1848년 혁명으로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정, 그리고 얼마 안 가 일어난 쿠데타로 수립된 제2제정의 지도자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가속화됩니다.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정책 근본은 大프랑스, 위대한 프랑스의 건설이었으며 나폴레옹 1세가 이룩한 영광의 재현이었으니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영향력 행사, 식민지 확보는 당연한 일이었죠.
프랑스 제2제정 황제 나폴레옹 3세
야심은 삼촌만큼 컸으나 능력은 삼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중국 진출에 있어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필수적인 곳이었습니다. 아직 동양에 자체적인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프랑스는 중국 문제에 있어서 영국에 의해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중국에 주도적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했습니다. 베트남은, 광둥성과 윈난성 등 중국 남부로 가는 거점이자 주요 교역로였고, 아울러 오래 전부터 프랑스 카톨릭 사제들이 포교해온 곳이라 정보도 비교적 충분했습니다.

더군다나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1825년부터 공식적으로 카톨릭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박해는 1848년부터 훨씬 더 심해져서 20,000명 이상의 신도들이 처형되었는데 이 중에는 유럽인 선교사 25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프랑스 인이 있다는 것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죠. 명분이 생긴 겁니다.

글이 길은 관계로 다음 내용은 가리겠습니다.

2. 제1차 침략 (1858~1862)
1857년 4월, 프랑스 제2제정은 베트남 개입을 공론화하고 실현 가능성을 의논하기 의해 코친차이나 위원회(La Commission de la Cochinchine)가 개최합니다. 여기서 프랑스 카톨릭 계는 학대받는 형제자매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베트남을 응징해야 한다며 개입을 강력히 요구했고, 팽창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해군과 해외시장을 필요로 하고 중국에서 영국에게 이대로 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던 국내 상공업계도 강력히 지지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결국 원정을 결의했습니다. 당시에는 애로호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중국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병력에 본국 병력을 일부 증원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프랑스는 샤를 드 몽타니(Charles de Montigny)를 특사로 보내어 카톨릭 포교의 자유화, 수도 후에에 통상대표부 설치, 프랑스 영사 임명의 재가, 1787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에 사과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합니다. 응우옌 왕조는 이를 거부했고, 프랑스는 침공을 시작하는 구실을 얻게 됩니다.

1858년 7월, 청 왕조와 톈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 침공군을 빼낼 여유가 생기자 프랑스는 즉시 베트남 침공에 나섭니다. 해군 함정 13척에 지상군 2,500여 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프랑스 원정군에, 역시 베트남에서 자국 선교사가 처형된 스페인이 보복을 위해 가세하여 450여 명의 지상군이 추가, 최종적으로는 약 3,000명에 달하는 지상군 전력이 편성됩니다.

해군 제독 리고 드 주누이(Rigault de Genouilly)의 지휘하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9월 1일, 중부의 항구도시 다낭을 공략하여 10월에 이를 함락시킵니다.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가 다낭과 인접했다는 점에서 베트남에겐 매우 심각한 위협이었고 연합군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후에를 직접 공략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지방을 무시하고 수도를 바로 직공하는 것은 아편전쟁 이래 서구열강의 전통적인 전쟁수행방식이죠.

그러나 연합군의 후에 공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선, 응우옌 왕조군이 1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즉각 반격을 해오며 방어전에 나선 데다, 후에로 진격하기 위해 이용하려 했던 수운은 생각보다 강이 얕았던 관계로 해군 함정들이 진입할 수 없게 되어 보급 및 병력 수송 문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열대지방 특유의 여러 전염병들은 연합군의 비전투 손실을 크게 늘렸고, 결정적으로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누이 제독은 전략을 변경, 후에 공략을 포기하고 다낭에는 약간의 병력만 남긴 후 주력을 남부로 이동시킵니다. 해가 바뀌어 1859년 2월, 베트남 남부의 핵심 요충지이자 남부 최대의 도시 쟈 딘 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합니다. 쟈 딘 성은 이후 사이공이라 불리게 됩니다.

쟈 딘 성 함락 및 베트남 남부 지역의 상실 응우옌 왕조에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안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거점을 확보한 반면, 응우옌 왕조는 최대의 곡창지역을 상실해서 경제적 대혼란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하필이면 1858~59년에 걸쳐 베트남 중부 지방은 대규모 흉년이 들었을 뿐더러, 연안 해운은 연합군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기에 이 위기는 더욱 더 심했죠.

그러나 프랑스도 곧 베트남에서 병력을 빼야 할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우선, 다고포대 포격 사건으로 청과의 전쟁이 재발했으며 유럽에서도 프랑스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우선순위가 밀리면서 주누이 제독이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원정군 병력 다수는 베이징 공략을 위해 투입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응우옌 왕조는 반격을 개시합니다. 약 12,000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800명밖에 남지 않은 프랑스 수비군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약 1년간에 걸친 반격의 결과, 쟈 딘 성을 탈환하고 주요 포대를 공략했으며 프랑스 군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프랑스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합니다.

그리고,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청은 항복하면서 애로호 전쟁이 종결됩니다. 마침내 프랑스의 동양에 대한 관심사가 베트남으로 돌려지기 시작한 겁니다. 총병력 약 5,000에 70척에 달하는 대 함대가 1861년 말에 베트남에 출현했습니다. 이들은 당장 자국군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개시, 베트남 군을 대파하고 구원에 성공했으며 뒤이어 요충지 미 토를 점령하고 쟈 딘을 재탈환했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베트남에 남부 3주의 할양과 개항, 포교의 자유, 배상금을 지불을 조건으로 내건 강화를 요구했고, 계속해서 비엔 호아, 바리아를 함락하고 1862년에는 빈 롱까지 점령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이들 지역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여 초대 코친차이나 총독으로 루이 아돌프 보나르(Louis Adolphe Bonard)를 임명해 현지로 파견했습니다.

이 무렵, 응우옌 왕조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레 왕조의 핵심지역이던 통킹 일대의 반란에 직면한 상태였던데다 전국적으로 경제적 위기에 거듭된 패전에 따른 위신 실추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반란부터 우선 진압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프랑스의 강화 요구를 받아들여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 동부 3성-비엔 호아, 쟈 딘, 딘 뜨엉-과 콘 썬 섬을 할양받고, 3개 항구의 개항에 성공했으며 은 400만 량의 전쟁배상금을 (스페인과 공동으로) 획득하고, 카톨릭의 포교 자유를 인정받았습니다.

제1차 침략 (1858~1862)
개전 첫 해, 수도 후에를 공략하기 위해 다낭(회색 점)을 점령했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후에 공략에 실패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쟈 딘(사이공, 호치민)을 공략한다.(붉은 색 가는 줄) 청과의 전쟁때문에  잠시 철군했던 연합군은 재차 공략을 단행, 쟈 딘을 탈환하고 코친차이나 일대를 석권한다.(붉은 색 굵은 줄)


2. 제2차 침략 (1867)
제1차 사이공 조약의 결과로 코친차이나 동부 3성을 획득한 데 이어,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마저 보호령으로 획득하면서 동양 식민지 개척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나 코친차이나 동부 3성은 새로운 지배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반란이 속출해서 프랑스는 통치에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 반란 세력은 바로 이웃의, 베트남령 코친차이나 서부 3성에서 자주 출몰해 지원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부는 반란의 근원인 서부 3성을 쓸어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죠. 더군다나 서부 3성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와 캄보디아 사이를 갈라놓고 있어서 이들 식민지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습니다.

신임 코친차이나 총독 드 라 그랑디에르(de la Grandiere) 제독은 응우옌 왕조에게 현 반란 상황이 종식되지 않으면 코친차이나 서부 3성을 공략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린 후, 1767년 6월 서부 3성에 대한 침공전에 돌입합니다.

응우옌 왕조의 남기경략사로 코친차이나 서부 3성을 통치하던 판 타인 쟌은 유럽에도 다녀온 바 있어, 유럽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군에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한 다음 그 책임을 지고 음독자살합니다. 응우옌 왕조는 모든 책임을 판 타인 쟌에게 돌리면서도 코친차이나 서부 3성 강탈에 대한 항의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3. 장 뒤피 사건 (1873)
장 뒤피(Jean Dupuis)는 중국에 거점을 둔 밀무역 상인으로, 특히 중국 지방군벌에 무기를 판매해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었죠. 그는 베트남의 홍 강을 통해 윈난성으로 가는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으나 베트남은 그의 선단이 무기를 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이를 핑계삼아, 장 뒤피는 코친차이나 총독 쥘 마리 뒤프레(Juels Marie Dupre)를 꼬드겼고, 뒤프레는 본국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통킹 침공을 시작합니다. 이 때 본국은 2년 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전으로 제2제정이 붕괴되고 제3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여러 혼란에 직면해 있었고 대외정책도 이전과 같은 팽창주의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뒤프레는 자신의 독단으로 일을 벌리면, 본국 정부가 마지못해 끌려오는 상황이 될 것이라 예상한 거죠.

1873년 11월 20일, 기습적으로 하노이 성을 함락한 것을 시작으로 북부 통킹 일대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프랑스 군은 현지 카톨릭 교도들의 호응 속에 통킹 삼각주 일대를 한 달도 안 되어 석권했는데 그 병력은 불과 200명에 불과했습니다. 응우옌 왕조는 이 정도의 침공도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카톨릭 교도의 호응으로 프랑스의 침공은 매우 쉬운 편이었죠. 이 와중에 하노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응우옌 왕조의 장군이자 10여 년 전 쟈 딘 전투 등에서 총지휘관으로 참전한 응우옌 찌 뿌엉은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응우옌 왕조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청의 흑기군과 싸우다 패배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군 지휘관 프랑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가 전사하였고 병력이 워낙 적어 승산이 없었습니다. 뒤프레 총독도 현실을 깨달았고, 응우옌 왕조와 연줄이 있던, 코친차이나 총독부 산하 토착민 정무감찰관인 온건파 폴 필라스트르(Paul Philastre)를 내세워 협상에 나섭니다.
1943년,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프랑시스 가르시에를 기려 만든 우표
프랑시스 가르시에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 총독부도 이 우표를 만들고 2년 뒤 소멸한다.
이 협상의 결과, 제2차 사이공조약이 체결되어, 응우옌 왕조는 코친차이나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공식 인정하고, 홍강을 개방하며, 하노이와 하이풍 등 통킹 지역에 프랑스 영사의 주재를 허락했습니다. 프랑스도 결정적 승리를 얻진 못하고 오히려 패전 위기에서 발을 뺀 덕에,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1차 조약 때의 전쟁 배상금을 면제해주고 베트남 근대화를 위한 여러 학자 및 기술자를 퍄견해주기로 약속합니다.

4. 제3차 침략 (1881~1884)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전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나고 본국 정부가 점차 안정화되면서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식민화를 노리게 됩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의 통상권을 거의 영국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중국 남부로 가는 통상로를 잃게 될 거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879년 들어선 본국의 신 정부는 베트남 북부 통킹의 식민화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 무렵의 총독 르 미르 드 빌레(Le Myre de Vilers)도 무력개입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 무렵 응우옌 왕조는 사실상 무력화에 빠져서 북부 통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이 지역이 지방 세력과 흑기군 등에 의해 장악되면거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명시된 홍강 통행권이 유명무실화되었습니다. 즉, 이를 명분으로 삼고 침략에 나선 거죠.

1882년 4월 25일, 앙리 리비에르(Henry Riviere)가 지휘하는 600명의 프랑스 군이 하노이를 함락했고, 하노이 총독은 패전 책임을 지고 자결합니다. 그러나 이후, 본국은 이집트 문제로 인해 베트남에 관심을 기울지 못하게 되었고, 리비에르는 군사적 행동을 일단 멈추고 응우옌 왕조에게 하노이 할양과 베트남의 보호국화를 요구합니다. 당황한 응우옌 왕조는 일단 명목상이나마 종주국인 청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청은 이를 받아들여 국경에 병력을 배치합니다.

당황한 프랑스가 홍강을 분할선으로 청-프랑스 세력권 분할을 제의하지만 이는 1883년 2월, 본국에서 강력한 팽창주의자이자 식민지주의자 쥘 페리(Jules Ferry)가 집권하면서 취소됩니다. 대신 리비에르는 점령지를 확대하다가, 73년의 가르니에처럼 한정된 병력으로 넓은 지역을 유지하려다가 하노이를 습격한 흑기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합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전사지점은 가르니에의 전사했던 곳 바로 근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10년 전과 달랐습니다. 의회는 대 베트남 전비 550만 프랑을 긴급 승인했고, 본국에선 사상 최대의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합니다. 뒤이어 1883년 12월에는 무려 3,000만 프랑의 전비 지출이 추가 승인되었고, 1884년 초까지 프랑스 본국은 코친차이나에 육해군 합쳐 16,500명의 대군을 파병합니다.

이들은 통킹에 주둔 중이던 흑기군과 청군을 완파해 베트남 바깥으로 축출한 뒤, 베트남 본국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을 가합니다. 반면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1883년 7월 국왕이 승하한 뒤, 1년동안 국왕이 4명이나 바뀌고 독살당하는 등 극심한 권력투쟁과 궁중암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서 제대로 된 전쟁 준비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스는 응우옌 왕조의 수도 후에를 향해 재차 진격을 개시했고, 본국의 대대적 증원을 받은 프랑스 원정군을 베트남이 요격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1883년 8월 25일, 아르망 조약의 체결로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을 보호국화하고, 베트남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통킹에서 베트남 군을 축출하고 통킹의 직접통치의 기반을 닦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코친차이나 식민지는 1개 성을 추가로 획득했고, 응우옌 왕조의 통치가 유지되는 중부 베트남에서도 관세와 토목에 대한 부분은 프랑스의 감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화 과정을 나타낸 지도

5. 청-프랑스 전쟁 (1884~1885)
한편, 베트남의 프랑스 보호국화는 명목상이나마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고 있던 청의 반발을 삽니다. 청에서는 대 프랑스 온건파인 리홍장이 잠시 실각하고 군기대신 쭤중탕이 대 프랑스 강경노선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존 리홍장이 맺었던, 프랑스의 베트남 우위를 인정하는 제1차 톈진 조약을 무효화합니다.

1884년 6월, 통킹 접수를 위해 북상하던 프랑스 군이 아직 통킹에 주둔 중이던 일부 청군 부대의 반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청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프랑스 해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하여 푸저우와 타이와, 닝보 등지를 공격하며 청 해군을 격멸하고 포격을 퍼부었으나 지상전은 전혀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특히 1885년 3월 랑 썬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청군과 흑기군의 연합부대에게 유례가 없는 대참패를 당해 약 4,000여 명의 병력 피해를 입고 소극적인 작전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패전 소식은 프랑스 본국에 전해져 이 책임을 지고 쥘 페리 내각이 총사퇴합니다.

그러나 청은 청대로 펑후도를 잃고 타이완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한 상태여서 계속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결국 청은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양측은 타협하여 제2차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내용은 제1차 조약과 거의 동일했으며, 대신 프랑스 군이 펑후도 및 타이완에서 즉각 철수한다는 것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입니다.
청-프랑스 전쟁 전개도
프랑스 해군은 중국 해군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중국 해안 곳곳을 들락거렸으나 육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6. 함 응이의 근왕령과 근왕운동 (1895~1887)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는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그 누구도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거부하거나 항의하려는 의시가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베트남 내부에서는 반 프랑스 기운이 드높았고 한 번 더 일어서서 싸워보자는 의지가 결연했습니다. 물론 제2차 톈진 조약 이후 그 분위기가 한 번에 다 쓸려나가기는 했습니다만, 1885년 7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루셀 드 쿠르시(Roussel de Courcy)의 강압적 면모는 이 분위기를 되살립니다.

특히 쿠르시가 면직을 요구했던 주요 고위인사가 프랑스에 대한 쿠데타를 주도합니다. 1885년 7월 4일 일어난 쿠데타는 그러나 프랑스 군 수비대에 대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고, 이들 유력자들은 국왕을 납치(...-_-;;)해 수도 후에를 탈출하고 머나먼 산악오지로 도피해 황제에게 근왕령을 내릴 것을 강요합니다. 이 불쌍한 국왕은 겨우 13세여서, 예전부터 자신의 주변에서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결국 자신을 납치한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이런 어린 아이가 근왕령이 뭔지,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 나라이고 왜 자기 나라에 쳐들어왔는지 알 리는 만무했죠.

어쨌든 이 근왕령으로 응우옌 왕조의 전혁진 관리들이 주도하여 곳곳에서 병력이 모여 프랑스 군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각지에서 최대 수천에 달하는 의용군이 모였고 이들은 프랑스 군을 곳곳에서 공격하며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세력권은 코친차이나에서는 확고부동했고 통킹에서도 상당한 우세에 놓여 있었으며 중부 안남 지방에서도 대부분의 거점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근대적인 프랑스 군에게 베트남의 구식 의용군들은 도저히 승리할 수 없었고 그 의기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패전만을 거듭합니다.

뒤이어, 1886년 4월, 프랑스가 응우옌 왕가의 한 사람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함 응이 국왕의 정부를 반역자로 몰았습니다. 뒤이어 프랑스 정부가 유화책을 사용하며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의하자 계속되는 패전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지휘관들이 줄줄이 투항(...)합니다. 뒤이어 1888년 11월, 함 응이 국왕 및 그 지도부의 은거지가 밀고로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고 국왕이 알제리로 유배를 가면서 근왕운동은 사실상 종결됩니다.

함 응이 (1872. 7. 22 ~ 1943. 1. 14, 재위 1884~1885)
응우옌 왕조의 8대 국왕. 1883년, 권력의 암투 속에 어린 나이에 즉위해 권력자들의 손에 놀아나다 근왕령을 내린 주인공. 알제리로 유배된 뒤, 프랑스계 알제리인과 정략 결혼을 한다. 그는 이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타지 땅에서 죽었다.

이후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1940년대까지 계속 됩니다. 프랑스 식민 지배의 종식은 1945년 3월, 비시 프랑스측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일본군이 뒤집어 엎은 직후인 3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야 공식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한편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통치 하에서도 식민 통치의 용이를 위한 프랑스의 정책으로 어떻게든 생존하다가 1945년 8월 30일, 당시 국왕이 베트남 공산당 측에게 국왕의 상징인 황금보검을 넘겨주면서 공식적으로 소멸됩니다.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위키피디아 영문

덧글

  • 나아가는자 2008/10/23 17:57 # 답글

    글 잘 봤습니다. 그나저나 베트남 공산당이 전제권력을 완전 부정하지 않고, 나름의 제스쳐를 통해서 권력을 이양받은게 신기하군요.
  • 심재호 2008/10/23 18:43 # 삭제

    그 점이 진보가 멸망하는 이유를 슬기롭게 극복한 호치민을 돋보이게 만들지요. 통합이라..... 만고불변의 진보에게 필요한 진리입니다.
    [보수에게는 변화.]
  • Ladenijoa 2008/10/23 19:02 #

    베트남 왕정에 대한 동정여론도 꽤 있었을 뿐더러, 충분히 평화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괜히 무력으로 해서 반발을 살 필요도 없으니까요.
    특히 1945년 베트남 왕조는 더더욱 그럴수밖에 없는게, 자신들의 생존이유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통치수단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 심재호 2008/10/23 20:12 # 삭제

    그러한 점도 있군요. 저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OSS와 협력 당시, 친일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라는 조건부 슬로건을 베트남 공산당이 내세운 것은 국가 주체로 보일만큼 대단한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 윙후사르 2008/10/23 18:47 # 삭제 답글

    잘 봤습니다. 근데 청나라가 만만하진 않았네요. 프랑스 육군이 꽤 고전하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근데 레왕조는 내부 반란으로 망했지 응우옌 씨에게 망한 게 아닙니다.
  • Ladenijoa 2008/10/23 19:08 #

    청이 두 차례의 전쟁 패전 후, 나름대로 군대의 신식화를 위해 노력한 데다, 중국 본국과 인접한 곳이 지상군의 주 전장이었던 것도 청에게 유리했던 점이죠.

    레 왕조 멸망은 레 왕조 마지막 국왕 찌에우 통 데와 그를 지원하기 위한 청의 병력이 탕 롱 전투에서 응우옌 왕조에게 패하고 찌에우 통 데가 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 다른가요?
  • 뽀도르 2008/10/23 22:44 #

    청이 승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군에 대한 사상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합니다. 청나라에 동정적(?)인 어느 사람의 관찰에 따르면 청군이 무기는 우수했지만(양무운동 등으로 해서 신식 무기는 제법 갖추었던 모양입니다) 병력 운용 등에서는 엉망이었던 모양입니다. 인해전술이었던 것인지... 청군의 무력함은 그 뒤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참담하게 재확인되었지요.
  • 윙후사르 2008/10/23 23:07 # 삭제

    17세기 초 베트남은 유력한 2개 가문이 나누게 됩니다. 그중 응우옌 씨가 남부였고 찡가가 북쪽이었고, 레왕조는 그냥 허수아비 신세가 됩니다. 문제는 이 두개 가문이 치고박는데 그들이 치고박던중 북부지역의 한 농민이 포로가 되어 남부로 옵니다. 이 농민이 응우옌씨랑 결혼했고 이 집안이 응우옌씨 성을 쓰게 됩니다. 다만 응우옌 자체가 너무 흔하고 흔해서 여기서의 응우옌씨가 남부를 차지한 그 응우옌이 아닐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이 농민집안이 떠이센 반란을 일으킨거죠. 이 반란에 두개 가문과 레왕조가 아작이 났는데 피난간 응우옌 잔당들이 프랑스랑 동맹맺고 이 농민반란군을 몰아내고 베트남을 통일한게 응우옌 왕조입니다.
  • Ladenijoa 2008/10/24 04:10 #

    뽀도르 / 전술적으로는 청도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전략상으로는 결국 본국에서 가까운 청의 승리었죠. 사실 그 이전까지 유럽열강은 청에게 늘 승리해오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고전을 보면 역시 프랑스군이란 생각이 듭니다.

    윙후사르 / 레 왕조가 허수아비인 채로 전락하고 찐 씨가 사실상 실권을 잡았다는 부분은 제가 참조하는 책과 동일하네요. 응우옌이야 베트남에 흔하디 흔한 성씨인 것도 사실이고-_-;;

    다만 제 책에서는 레 왕조의 마지막 정통(?) 세력이 청의 지원을 받아 1787년에서 1789년에 걸쳐 응우옌 군과 싸우다 패했다고 나오는데 이 부분이 윙후사르님이 아는 부분과 서로 상이한 건지 여쭙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에 베트남史 관련 서적이 적은 데다 연구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무엇보다 제가 책 1권에만 의존한 덕택에 저도 좀 이것저것 참고자료를 더 취합해야 할 듯 싶네요.
  • 윙후사르 2008/10/24 23:22 # 삭제

    레왕조를 박살낸 응우옌 군은 따이선 반란군입니다. 동남아시아 사를 부흥과 다음 토탈워등에 연재하시던 앨런비님 말씀으로는 이 반란군 이끈 3형제가 응우옌 씨지만 17세기 부터 남부를 지배했고 19세기 베트남을 통치했던 응우옌씨가문과 혈연관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Ladenijoa 2008/10/25 01:51 #

    응우옌이라는 성에 의한 혼동이란 말씀인가요? 골때리는군요;; 그런 경우라면 진짜 자세히 찾아봐야 하는데 베트남史를 한국에서 제대로 접하기는 어려우니-ㅅ-

    좀 오래 걸리겠지만 해당 사실을 확인해보겠습니다. 꾸벅
  • 정호찬 2008/10/23 18:56 # 답글

    1884년 초까지 프랑스 본국은 코친차이나에 육해공 합쳐 16,500명의 대군을 파병합니다.=> 유럽 중화 5천년 신비의 라팔?
  • Ladenijoa 2008/10/23 19:09 #

    우와아앙 사실은 근성의 힘으로 라팔을 소환한 겁니다?

    어쨌든 수정했습니다 꾸벅-ㅅ-
  • 소시민 2008/10/23 19:33 # 답글

    어린 나이에 알제리라는 완전히 다른 머나먼 문화권으로 유배를 당했다...

    함 응이 왕도 참 비운의 인물이네요.
  • Ladenijoa 2008/10/24 04:04 #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군주나 유력자들 중에는 저런 사례가 많습니다.

    다만 함 응이 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용만 당하다가 끌려간 사례라 더 불쌍하달까요...;;
  • 파도지기 2008/10/24 01:02 # 삭제 답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친 전쟁이죠.
    갑산정변이, 이때(1884년 이니까 5. 청-프랑스 전쟁이군요)
    청이 조선주둔군 3000명중 반인 1500명을
    베트남으로 파병한 틈에 일어났으니까요.

    그런데 청군이 반으로 줄었다지만
    개화파가 믿고있던 일본의 군사력은 남은 청군의 1/10인 150명.
    도대체 어떤 계산이었는지...
  • Ladenijoa 2008/10/24 04:04 #

    유럽열강의 지원을 얻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아니겠습니까.
    막연한 기대는 막연한 기대로 끝날 뿐이죠...
  • 2010/01/11 14:3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ㅇㅅㅇ 2015/04/17 22:49 # 삭제 답글

    조으다
  • ㅇㅅㅇ 2015/04/17 22:49 # 삭제 답글

    조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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