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지의 올해의 인물 (3) 1947 ~ 1956년 History

TIME지의 올해의 인물 (1) 1927 ~ 1936년 (2008. 10. 22)
TIME지의 올해의 인물 (2) 1937 ~ 1946년 (2008. 10. 24)

에서 이어지는 연재물 포스팅의 세 번째입니다. 사실 아까 낮에 한 번 완성했는데 포스팅 올리기 직전 날아가버려서 새로 죄 작성했습니다 ㅠ.ㅠ 지난 번 포스팅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길은 관계로 첫 번째 인물만 공개되게 하고 나머지는 가려놓았습니다.


1947년 - 조지 마셜 George Marshall 1880. 12. 31 ~ 1959. 10. 16


군에서 전역하고 트루먼 내각의 국무장관이 된 조지 마셜이 두 번째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이유야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마셜 플랜의 전격적인 제안이었죠.

총통 각하, 강철의 대원수, 처칠 총리라는 걸출한 세 대인배의 싸움에 휘말리느냐 유럽은 초토화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탈리아도 전화의 한복판에 휘말렸으며, 영국은 허구한 날 독일 공군과 V1, V2의 공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스도 독일과의 전쟁 및 내전으로 황폐화된 건 마찬가지였고, 노르웨이나 핀란드도 사정은 비슷했죠. 독소전의 주무대가 된 소련 서부 및 동유럽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마셜은
초토화된 유럽에 대해 미국이 대대적인 재정지원을 단행하여 빠른 전후복구를 도와주어 유럽을 회복시킬 것을 제의합니다. 서서히 동서냉전 구도가 확고히 되어가던 이 무렵, 마셜의 이러한 대대적인 유럽 전후복구 지원책은 소련의 서진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을 최대한 빨리 회복시켜야 한다는 전략적 필요성 유럽의 빠른 회복으로 미국 산업력이 소비시장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경제적 필요성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계속 보실려면 밑의 이어지는 내용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1948년 -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 5. 8 ~ 1972. 12. 26


1945년 4월, 전임자인 F.D.R의 급사로 얼떨결에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연임 가능성은 매우 낮았습니다. 전임자였던 F.D.R에 비하면 그 인기가 현저히 낮았을 뿐더러 개인적인 정치적 기반도 미약했고, 1932년 이후 16년동안의 민주당 집권에 대한 염증도 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도 이미 3년 전의 일이어서 전시 효과 및 승전 효과를 바라기도 어려웠죠.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트루먼 개인의 대중적 지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건 분명했을 뿐더러, 대부분의 여론조사도 공화당의 승리를 확신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남부주에서 트루먼 지지를 포기한 민주당 내 우파세력이 탈당하여 독자 후보를 내어 표분산까지 기대되었습니다. 선거 당일, 트루먼이 선거결과 보고를 기다리지도 않고 일찌감치 잠들었다는 일화도 있죠. 보나마나 질 거라면서(...)

그런데 이긴 겁니다.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은 유효투표수의 49.6%를 획득하고 28개 주에서 승리, 303명의 선거인단을 차지하여 말 그대로 압승을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승리였죠.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트루먼이 올해의 인물이 될 자격은 충분한 거 아니겠습니까?



1949년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 11. 30 ~ 1965. 1. 2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구국내각의 수상으로서 대독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었지만 영국 국민들은 평시 지도자로서의 처칠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7월 25일 총선거에서 애들리의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처칠의 보수당은 대참패했습니다. 처칠은 이제 야당의 지도자가 된 거죠. 하지만 대인배의 필수 조건인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활발한 대외활동과 국제외교 개입에 나섰습니다. 1946년 미국 방문에서는 미국민들의 열렬한 성화를 받으며 곳곳에서 연설 요청과 명예박사 학위 제의, 선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처칠의 전용차량으로 부족해서 선물을 실기 위해 따로 트럭을 마련해야 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죠.(...)

온갖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의 확대를 경계, 비판하고 유럽에 철의 장벽이 쳐져 있다는 그의 연설은 아직까지도 많이 쓰여지죠. 정치권에서는 보수 야당의 지도자다운 성격을 확실히 보여주며 노동당의 대외정책을 공격하고, 48년부터는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년도별 1권씩 출간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면을 종합한 덕에 윈스턴 처칠이 올해의 인물로 다시 한 번 선정됩니다.


1950년 - 미국 군인 The American Fighting-Man


역대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에 있어 한국인이 선정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만 최소한 한국과 관련되어 선정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1950년의 일입니다. 1950년 6월 25일, 평양의 혹부리 동지께서 38선을 넘어 대대적으로 남침을 시작하신 겁니다. 국군은 용전분투했으나 결국 패퇴해 낙동강까지 후퇴했죠.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UN군이 머나먼 극동의 나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이들은 초기 스미스 부대의 패배와 딘 소장 실종 등과 같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끝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38선 이북으로 진격을 개시, 대부분의 한반도 지역을 접수합니다. 11월부터는 중공의 개입으로 다시 퇴각하는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희생을 폄하할 이유는 없지요.

때문에 타임지는 최초로 불특정다수 집단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머나먼 한국 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미국 군인들을 위한 격려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잡지다 보니 다른 나라 군대는 쏙 빼놓고 미국 군인만 선정해 버린 게 아쉽군요. 병력이 적어도 참전한 다른 나라들이 많은데... 여튼 이 자리를 빌어 머나먼 한국 땅에서 싸우다 전사하신 UN군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러나...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리태조께옵서는 2년 뒤인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시고 장기집권의 토대를 닦으시니(두둥). 리태조는 1950년에도 침략한 쪽보다는 침략당한 쪽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타임지 경향상 후보로 올랐으나 전쟁 터진 지 며칠만에 비 내리는 경부선 남행열차에 몸을 실으신 전력때문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1951년 - 모하메드 모사데그 Mohammed Mossadegh 1882. 5. 19 ~ 1967. 3. 5


1941년의 영소 연합군의 이란 침공과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이하 AIOC)로 대표되는 서구열강의 자원 수탈에 대한 분노는 이란에 지속적으로 반영 감정을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앞세워 이란의 페르시아 해에 접한 유전지대에서 생산한 석유를 자국으로 헐값에 가져갔고, 이러한 사실은 1941년 강제 폐위당한 선대 국왕이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은 사건(1944) 등과 연계되어 영국에 대한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1941년과 달리 영소 양국이 대립 중이어서 이란으로선 양국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당할 우려가 없어진 채 다시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란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 세력은 연합해서 AIOC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이를 위해 1951년 4월, 이란 의회는 모하메드 모사데그를 신임 총리로 지명합니다.

모하메드 모사데그는 전격적으로 AIOC 등 서방 진영이 갖고 있던 모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후 20여 년 뒤에 나타나는 자원 민족주의, 자원 국가주의의 모태가 되는 사건이죠. 모하메드 모사데그의 전격적 국유화 조치는 이란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반대로 영국에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죠.

후일담으로, 2년 뒤 모하메드 모사데그 내각은 미국과 영국이 합작한 공작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붕괴됩니다.(...)



1952년 -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1926. 4. 21 ~


1952년 2월 6일, 대영제국 국왕이며 인도연방이 독립할 때까지 인도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조지 6세가 승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윈스턴 처칠의 구국내각을 묵묵히 지원하며 영국인들의 국가수반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조지 6세가 승하하면서 다음 왕위는 자연스레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조지 6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로 넘어갑니다.

당시 남편과 함께 영연방 국가를 순방 중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아프리카에서 이 소식을 들은 후 급거 귀국하니, 그녀가 바로 지금까지 대영제국의 국왕의 자리에 올라있는 엘리자베스 2세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 대관식은 1953년에 있었지만 1952년부터 그녀는 사실상 대영제국의 국왕이었죠. 조지 6세가 죽기 이전에도 어느 정도 국왕의 임무를 대리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미국으로선 2차대전때부터 가장 믿음직했던 동맹국인 영국의 국왕이 바뀌는 일에 당연히 커다란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영국 왕가에 대한 관심은 심프슨 부인 스캔들 이후 매우 커졌을 뿐더러, 새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반 세기만의 여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매우 컸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 소식을 뒤엎을 정도였으니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걸 알만하지 않습니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에 더없이 적절하죠.



1953년 - 콘라드 아네나워Konrad Adenauer 1876. 1. 5 ~ 1967. 4. 1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말 그대로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죽어갔고, 좁은 영토에는 동프로이센, 주테텐란드 등지에서 도망친 난민으로 가득찼으며 도시란 도시들은 모두 대규모 폭격으로 소멸해 버렸습니다. 정부는 해체되었고, 승전 4개국 군대가 진주해 분할통치했죠.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독일(서독)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유럽의 일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이 바로 콘라드 아데나워입니다. 1949년 총리가 된 이래 그는 줄곧 전후 경제복구 및 유럽의 일원이 되기 위한 외교에 전념합니다. 그는 아예 외무부 장관직까지 직접 겸임하면서 외교를 중시했죠.

그 결과, 유럽 위원회 및 유럽 방위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었고,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의 창설멤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데 성공한 거죠. 이후로도 유럽의 집단안전보장체제, 이후 NATO가 되는 기구의 출범을 적극 지지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견제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서독을 서방체계에 편입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아울러 프랑스와의 화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죠. 경제적으로는 마셜 플랜으로 지원받은 자금을 효율적으로 활용, 서독의 경제재건을 상당히 빨리 이룩합니다.

한국에선 막 전쟁이 끝나고, 미국 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불고 있던 1953년, 옛 적국이던 독일을 빠르게 부흥시킨 데다 반공주의자이기까지 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그 해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1954년 - 존 덜레스 John Dulles 1888. 2. 25 ~ 1959. 5. 24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존 덜레스는 1954년에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SEATO를 창설하는 데 깊이 관여하며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세력 저지에 골몰했고, 덜레스 노선이라 불리는 미국의 보수적 외교노선을 확립시켰습니다. 이 노선은 국제사회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데 있어 적극적으로 나서서 냉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이론이죠.

하지만 덜레스가1954년 가장 주목을 받은 이슈는 바로 뉴록(N
ew Look) 정책의 제창입니다. 1954년 1월 제창된 뉴록 정책은 예상되는 전쟁에서 소련의 도발 및 군사적 공격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늘 그 이상으로 확실한 보복이 가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실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지체없이 우리가 받은 이상으로 소련에 보복을 가한다는 개념입니다.

뉴록 정책에서 나오는 소련의 도발이나 그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모두 핵무기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미군은 핵무기 사용을 위한 전략적 투사수단의 적극적 확보에 나섭니다. 사실상 현대 핵전쟁 개념을 확립한 것이며, MAD의 기원이기도 하는 정책이죠.(...)

아직도 매카시 광풍이 사라지지 않고 있던 1954년, 대 소련 강경책을 적극적으로 제창하던 덜레스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1955년 - 할로우 커티스Harlow Curtice 1893. 8. 15 ~ 1962. 9. 3


미국의 가공할 산업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적들, 특히 일본에게 커다란 충격과 공포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전시체제로 개편되었던 산업시설들은 다시 평시 민간경제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고 1950년대는 바로 이 민간경제 체제로 돌아온 기업들의 본격적인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그 중 자동차 업계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며 승리를 거둔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GM, 제너럴 모터스입니다. 새로운 차종을 내세우고 적극적인 경영정책으로 확실한 우위를 잡았으며 아울러 군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군납차량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GM에 대한 우스개소리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회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회사는 소련이라는 게 이 우스개소리의 핵심이죠.

특히 1955년, GM은 단일기업으로선 최초로 정부에 낸 세금이 1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그만큼 GM은 일취월장하며 빠른 속도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고,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대단했습니다. 때문에 1928년, 월터 크라이슬러에 이어 두 번째로 자동차 회사의 CEO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니 1952년부터 CEO를 맡고 있던 할로우 커티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그러나 지금 GM은 언제 파산할 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주가는 1950년대로 돌아가 버렸으니 역시 부귀영화는 짧은 겁니다.(...)



1956년 - 자유를 위해 싸운 헝가리 인들 Hungarian Freedom Fighter


1955년부터 시작된 헝가리 혁명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을 등에 업으며 더욱 과격화되고 활발해집니다. 자유를 위한 헝가리인들의 투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승리에 가까워졌고, 결국 소련군의 제1차 개입 시도마저 격퇴해 버렸습니다. 전국에서 자유를 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헝가리 군인들마저 대열에 합류하면서 소련의 괴뢰 공산정부가 몰락한 겁니다. 위대한 승리였죠.

그러나 위대한 승리는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나기를 대표로 하는 헝가리 신 정부는 내적으로는 복수정당제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를 추구하며, 대외적으로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탈퇴와 헝가리의 중립국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에 대한 우위를 인정받은 소련을 결코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고, 동유럽의 다른 괴뢰국들과 함께 1956년 11월부터 헝가리 침공을 개시합니다.

일부 헝가리 군과 시민들이 온몸을 던져가며 침략자에 맞섰으나 가공할 소련군의 위력 앞에 헛되이 피를 뿌렸을 뿐이죠. 결국 헝가리 정권은 다시 붕괴, 친소 괴뢰정권이 재차 등장했습니다. 헝가리 혁명 기간동안, 자유를 위해 싸운 모든 헝가리인들을 위해 타임지는 다시 한 번 불특정다수의 집단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거 말고 서방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의 세력권 분할때문에 헝가리는 명백히 소련권이었던 데다, 동구권 한가운데에 있어 구원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설사 구원을 간다 해도 소련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는데 서방 지도자들은 아무도 그걸 각오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헝가리의 필사적인 대 서방 구원요청은 모두 묵살되었고, 서방이 보내준 건 고작 타임의 올해의 인물 선정 및 이와 비슷한 상징적인 지지와 격려가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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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주코프 2008/10/27 21:38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헝가리 혁명'은 불의에 맞서싸운 민중의 항쟁으로서

    '광주'의 정신과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대학시절 운동권회보등등에선 'CIA의

    음모에 부화뇌동한 반동들의 폭동' 비슷하게 선전하던 것이 기억나네요..
  • Ladenijoa 2008/10/28 04:09 #

    운동권에서는 그렇게 가르친단 말입니까?-_-;;
    그 사람들은 소련 치하에서 좀 살아봐야겠군요.
  • 심재호 2008/10/28 08:43 # 삭제

    뭐, 이건..... 대화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군요...
  • 일곱 혼돈 2008/10/28 11:53 #

    옛날 PD들 중에서도 극단주의자들이 그렇게 가르쳤을 겁니다만, 지금은 또 다를 겁니다. 동구권 붕괴 이후 진상이 다 까발려졌으니 말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PD 중 제일 과격하다 할 수 있는 사노련도 듕국과 북한을 잘근잘근 즈려씹는 것을 보면 요즘은 안 그럴 겁니다.
    NL 주사파야 뭐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냈으니 예외로 치고.
  • 일곱 혼돈 2008/10/27 22:14 # 답글

    모사데그 이후 팔레비 왕의 삽질과 호메이니의 집권, 그리고 이란의 신정주의화를 생각하면 모사데그 축출은 정말 최악의 삽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 Ladenijoa 2008/10/28 04:10 #

    뭐 모사데그 축출 후 팔레비가 그렇게 말아먹을 줄 영국은 꿈에도 몰랐겠죠-_-;; 결과론적으로야 모사데그와 그냥 적절히 타협하는 게 나았을 듯 싶기도 한데 말이지만요.....
  • 소시민 2008/10/27 22:38 # 답글

    트루먼 하면 상대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오보를 실은 신문을 들

    고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생각나네요.

  • Ladenijoa 2008/10/28 04:11 #

    진짜 1948년 대선의 결과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니까요. 역시 투표함은 열어봐야 안다고, 이번 대선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행인1 2008/10/27 22:55 # 답글

    지구 반대편의 전쟁 소식을 뒤엎을 정도->그런데 그 전쟁이란게 워낙 듣보잡 소국에서 일어난 일인지라....;;;
  • Ladenijoa 2008/10/28 04:11 #

    듣보잡 소국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시 미국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젊은이가 10만 명 넘게 가서 싸우고 있는 곳이니까요
  • TSUNAMI 2008/10/27 23:03 # 삭제 답글

    1956년의 사진에 대한 얘기를 첨가해 보자면, 스탈린에 이어 흐루시초프와도 종종 티격태격했던 요시프 브로즈도 "파시스트 호르티의 추종자들이 주도한 반혁명사태"라고 비난하고서는 심지어 흐루시초프한테 슬쩍 지원의사까지 내비쳤다지요.
  • Ladenijoa 2008/10/28 04:13 #

    오오오옿 티토가 무려 티토가 그랬던 겁니까?-_-;;;;;
    티토는 공산정권을 수립했으면서도 유고슬라비아를 중립국화시키고, 서방에도 적당히 맞장구 쳐주는 센스가 있던 사람인데 역시 티토의 외교술은 가히 대인배의 반열에 올라야 겠습니다.
  • 윙후사르 2008/10/27 23:18 # 삭제 답글

    하기사.. 며칠 안되서 튀는 인간(거기에 도망가면서 다리까지 끊어서 서울시민 엿먹인) 그런 인간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할 수는 없었겠죠.
  • Ladenijoa 2008/10/28 04:13 #

    예, 최소한 군과 같이 움직여주는 시늉이라도 하거나, 거짓방송 안 하고 텼으면 가능성은 있었을텐데요;;
  • 이네스 2008/10/28 02:38 # 답글

    으음. 이승만이 이거에 되었으면 타임지 편집부가 집단으로 마약한거지요...

    뭐. 역시 미쿡에는 독특한 인물이 많습니다.
  • Ladenijoa 2008/10/28 04:14 #

    아니 어쩌면 조롱의 의미로 이승만을 선정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네스 2008/10/28 04:39 #

    조롱의 의미로 한건데 우리나라 꼴통들은 이걸 이상하게 해석할듯하지 말입니다.. ㅠㅠ
  • Empiric 2008/10/28 10:31 # 삭제

    Korean 중에 선정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간을 생각해보니..
    역시 장군님이. orz
  • 애독자 2008/10/28 08:09 # 삭제 답글

    아악! 며칠전 시험에서 답이 '덜레스 노선'인 문제가 있었는데요. 그 때 이 포스팅을 봤었다면ㅠㅠ<-
  • Ladenijoa 2008/10/28 14:51 #

    ㄷㄷㄷㄷㄷㄷㄷ 이거 제가 다 게으른 탓입니다 꾸벅-_-;;
  • 레인 2008/10/28 10:16 # 답글

    아데나워 같은 사람이 이 나라에 필요한데 말이죠 ㄱ-
  • Ladenijoa 2008/10/28 14:52 #

    아데나워는 6~80년대에는 몰라도 그 이후 한국에는 좀 적합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반공주의라랄까요.
  • 회생도우미505 2013/03/12 05:37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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