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지의 올해의 인물 (6) 1977 ~ 1986년 History

TIME지의 올해의 인물 (1) 1927 ~ 1936년 (2008. 10. 22)
TIME지의 올해의 인물 (2) 1937 ~ 1946년 (2008. 10. 24)
TIME지의 올해의 인물 (3) 1947 ~ 1956년 (2008. 10. 27)
TIME지의 올해의 인물 (4) 1957 ~ 1966년 (2008. 11. 2)
TIME지의 올해의 인물 (5) 1967 ~ 1976년 (2008. 11. 9)

에 이어지는 연재 포스팅입니다. 시대가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제가 아는 사람이 늘어나니 포스팅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TIME지의 올해의 인물 2008 선정과 마지막 포스팅을 맞추겠다는 생각에 연재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사실 8번째 연재가 될 1997 ~ 2002년은 거의 완성되었고, 마지막 연재가 될 2003 ~ 2008년도 올해인 2008년을 제외하고 모두 완성된 상태입니다.

이제 마지막 고비는 1987 ~ 1996년인데 여기서도 아는 인물이 좀 많은 편이라 의외로 쉽게 해결될 듯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 연재 포스팅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 발표에 맞추려면 적당히 뜸을 들이는 게 나을 듯 싶더군요. 작년같은 경우 미국 현지시각으로 12월 19일에 타임이 올해의 인물을 발표했는데, 올해도 같은 날짜에 발표한다고 가정할 경우 남은 포스팅 3개로 한 달을 뻐겨야 합니다;; 그래서 1987 ~ 1996년을 1987 ~ 1991년과 1992 ~ 1996년 2개로 쪼개서 총 10회로 이 연재물 포스팅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이글루스, 왜 느닷없이 태그 오류가 일어나는 걸까요? 태그 등록하려고 했더니 30자 이상 태그는 등록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 30자 이상의 태그는 등록한 일 자체가 없습니다-_-;; 덕분에 꼭 필요한 태그들도 몇 개 지우고 나니까 그제서야 등록되더군요.


1977년 - 안와르 사다트 Anwar Sadat 1918. 12. 25 ~ 1981. 10. 6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의 패전은 이집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기존과 달리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더 이상 아랍국가들이 형편없고 무능에 빠진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지만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은 오랜 기간의 철저한 준비 끝에 완벽하게 전략적 전술적 기습 달성에 성공하고 이스라엘의 허를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또 패전한 겁니다.

나세르의 후계자였던 이집트의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이대로 가다간 가망이 없다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사다트는 줄을 갈아타기로 결정한 겁니다. 소련에서 미국으로요.(...) 그와 소련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사다트는 이 참에 줄을 갈아타고 이스라엘과의 평화관계를 모색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1977년 11월 19일, 그 노력의 일환으로 사다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불과 4년 전까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서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야 한다며 이를 갈고 피터지게 싸우던 사이였는데, 사다트가 기존의 적대관계를 깨고 이스라엘을 방문, 이스라엘 의회에서 중동평화안을 연설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이집트깽깽이와 대등한 평화를 논한다는 건 상상도 안 했으나 욤키푸르 전쟁 이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전쟁에서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절대적으로 깨달은 이스라엘은 두 적대국 이집트, 시리아 중 어느 하나와 평화관계를 맺고 전력을 철저히 어느 한 쪽에 집중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그 결과 중동에는 평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지속된 중동의 전란이 이제 끝마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타임지는 사다트 대통령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그러나 왠걸?(...) 이집트랑 평화협정을 맺은 뒤로 이스라엘은 얼씨구나 하고 레바논에 기어 들어가질 않나, 이란에 혁명이 터지고 후세인이 이란과 쇼부를 치더니 쿠웨이트를 낼름 하려 하지 않나. 다시 부시가 아프간을 치고 이라크로 기어 들어가지 않나. 중동의 전란은 언제 끝난다는 걸까요-_-;;


내용이 길어지니 가리겠습니다. 더 보시려면 밑의 문장을 클릭하세요.


1978년 - 덩 샤오핑Deng Xiaoping 1904. 8. 22 ~ 1997. 2. 19

장 총통을 물리치고 대륙을 평정하며 반도에 원병을 보내어 천하를 안정(?)시킨 이 시대의 진정한 대인배 마오쩌둥의 통치기간동안 그야말로 중국 대륙은 폭풍의 한 가운데에서 온갖 삽질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오 대인배가 1976년 세상을 뜨면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마오 대인배 밑에서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그 중 하나가, 마오쩌둥 못지 않은 대륙의 대인배, 덩샤오핑이었습니다.

그는 또 다른 대인배 화궈펑과 권력을 둘러싼 운명의 승부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1978년에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고, 국가주석에 취임하며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 중국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마침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합쳐서 거의 30년에 달하는 오류를 수정하고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한 그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됩니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그는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중국 경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시대의 명언인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흑묘백묘론-도 바로 이 때에 나왔죠.

더군다나 중국은 이미 친소 국가라기보단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유사시 소련의 배후를 찔러줄 잠재적 동맹국이었던 데다, 그 거대한 대국의 경제적 발전 및 개방을 천명해서 많은 미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잠자는 용, 중국을 깨우며 승천을 준비하던 덩샤오핑이 1978년의 올해의 인물이 됩니다.


1979년 - 아야톨라 호메이니 Ayatollah Khomeini 1902. 9. 24 ~ 1989. 6. 3

입헌 군주제의 이름을 빌린 팔레비 2세의 전제통치에 이란 국민들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곳곳에서 자행되었고 국민들의 자유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죠. 그러나 팔레비 왕조의 철권 통치도 서서히 그 끝에 달하고 있었고 1978년 후반부부터 전국적으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한 반정부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상가 철시와 동맹휴학 및 등교거부, 파업 등이 잇따르고 이란 정부는 이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으며 마침내 레자 샤 팔레비 2세가 해외망명하면서 이란 국민들은 승리를 이룩해 냅니다. 그리고 권력의 공백을 메꾼 건,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한 이란의 명성높은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였죠.

호메이니는 망명 생활 내내 팔레비 왕조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그 높은 명성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가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었죠. 이란 혁명이 이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인데, 호메이니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통치를 강조합니다.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급의 막장 적용은 아니고 상당히 융통성이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하군요.

하긴 그래도 이란은 현재 아랍권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군요.(...) 무려 아랍권에서 4대 원칙에 입각한 투표를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_-;; (그 전에 후보들을 종교계에서 커트하긴 하지만;;)


1980년 -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1911. 2. 6 ~ 2004. 6. 5

4년 전 압승을 거두었던 지미 카터지만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민주당 정책에 대한 비판이 늘었고 현역 프리미엄도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판국에 1979년 이란 혁명 직후에 터진 테헤란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인질 구출 작전 실패는 지미 카터 행정부와 그의 인기를 단번에 깍아 버렸습니다.

한편 공화당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은 영화배우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그는 4년 전 공화당 경선에도 나서서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에게 아슬아슬하게 패한 적도 있는, 공화당의 유력 대권주자였고 1980년에도 무난하게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보수적 가치를 역설하고 외부의 적에 강력히 맞설 것을 제창한 로널드 레이건에게, 이란 대사관 사건으로 인기를 크게 잃어가던 지마 카터로서는 도저히 역부족. 1980년 대선은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 미네소타, 웨스트 버지니아, 로드 아일랜드, 메릴랜드, 하와이 6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모두 49명의 선거인단을 얻는 게 그쳤고, 나머지는 모두 레이건이 싹쓸이. 득표율 차이는 10%에 달했습니다.

이후 1992년까지, 더 넓게 보자면 2008년까지 지속되는 공화당에 의한 미국의 우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1980년 대선의 결과였습니다. 레이거노믹스를 알리는 선언이기도 했죠.


1981년 - 레흐 바웬사 Lech Walesa 1943. 9. 29 ~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천국은 얼어죽을 천국. 노동자들의 현실은 별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노조라는 것도 대부분 관영 노조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아예 노동자들의 나라에서 노조가 왜 필요하냐?며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때문에 동구권에서는 자유노조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일부 있었는데 1970년대부터 이 투쟁을 하던 사람이 레흐 바웬사입니다.

그는
1980년 8월부터 폴란드 조선소에서의 전면적인 총파업을 기획, 주도했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 자유 노조의 설립이었죠. 총파업은 불과 한 달 만에 승리를 이루었고, 레흐 바웬사의 지도 하에 폴란드 조선소 노동자들은 그들의 목적인 자유 노조 설립을 이룩해 냅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정권이 탄생하자 소련 및 동구권은 즉각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떠한 유화책도 있을 수 없다는 강경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대표적 유화책 중 하나였던 폴란드 자유 노조를 다시 금지하기로 결정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레흐 바웬사는 1981년 12월에 정부에 체포됩니다.

자유 노조를 위해 공산당에 맞서 싸우다 체포된 레흐 바웬사는 유럽이나 미국에게 있어 동구권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1982년 -컴퓨터The Computer

...타임지 올해의 인물 선정 사상 최초로 인간이 아닌 사물이 선정되는 쾌거(?)를 이룩한 컴퓨터에게 진정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IBM과 MS의 합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980년대, 초반 그 중에서도 1982년은 상당히 의미깊은 해였습니다.

시대의 영웅(...) 빌 게이츠 본좌께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를 창립하시고 몇 년 뒤, 컴퓨터 업계의 본좌 IBM이 MS에 의뢰를 해옵니다. 자신들이 개발해서 판매할 예정인 퍼스널 컴퓨터 구동용 OS 제작 의뢰였죠. 이 의뢰를 받아들인 빌 게이츠와 MS는 마침내 시대의 역작 MS-DOS를 개발하니, 바야흐로 이 때부터 진정한 컴퓨터 시대가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1982년, 마침내 MS가 개발한 OS MS-DOS를 탑재한 퍼스널 컴퓨터가 시중에 공식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마침내 집집마다 컴퓨터라는 해괴망측한 기계가 팔리는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그리고 타임은 컴퓨터의 가정 보급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어느 정도 예측하여 컴퓨터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대범함을 보여 줍니다. 물론 당시 타임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측했을 지는 모르겠습나다만.

그리고 20년도 훨씬 지나서... MS는 어느새 IBM을 능가하는 공룡기업이 되었고, 빌 게이츠 본좌는 돈벼락을 맞으셨으며
이제 1가구 1PC가 아니라 1인 1PC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당장 제가 이렇게 자료를 찾아 포스팅하는 것도 컴퓨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1983년 -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 1911. 2. 6 ~ 2004. 6. 5 (이미지 생략)
1983년 - 유리 안드로포프 Yuri Andropov 1914. 6. 15 ~ 1984. 2. 9

1982년 11월, 소련 공산당 총서기 브레즈네프가 갑자기 숨을 거두면서 공백으로 남은 소련의 권력은 오랜 기간 KGB 의장을 역임한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돌아갔습니다. 유리 안드로포프는 KGB 출신답게 기존의 대외정책을 답습 혹은 더 강화시켰다는 평가가 제기되기도 했죠. 특히 1983년 9월 1일, KAL-007기 격추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에 빠트렸고 유리 안드로프프 통치하의 소련이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죠. 실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속했으며, 유럽에서는 미국의 퍼싱 배치에 대항하여 SS-20을 배치,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냉전의 다른 상대방인 미국의 대통령은 바로 로널드 레이건! 소련이 강하게 나선다고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련이 약하게 나오면 좀 더 세게 나오라고 할 양반이었던 거죠.(...) 로널드 레이건은 계속해서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신무기 개발 및 장비 확충 등을 지시했으며, 1983년 3월 23일에는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 SDI 구상을 내놓습니다. KAL-007기 격추 직후에는 바로 보복조치로 소련 민항기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고요.

예,
미소간 대립이 1983년을 기점으로 극에 달한 겁니다. 양측은 서로 캬르릉거리며 서로를 못잡아 먹어 안달난 것처럼 보였고 미친 듯이 군비를 투자하며 "오냐 한 판 붙어보자"식으로 서로를 위협했습니다. 스타워즈 계획과 유럽의 미사일 배치 문제, 거기다 KAL-007기 격추 등이 겹치면서 1983년 세계 사람들은 매우 암울한 한 해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극단적으로 달리다간, 인류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냉전의 열전화. 핵이 무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던 겁니다.
미소 냉전은 점점 심해져만 갔고, 심해지는 냉전을 반영하여 타임은 동서 진영의 거두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1984년 - 피터 우베로드 Peter Ueberroth 1937. 9. 2 ~
1977년, 미국은 실로 오래간만에 하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는 감격을 누립니다. 1932년 대회 이후 무려 52년만의 하계 올림픽 개최였죠. 그러나 세상 일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라고,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무력 침공에 항의하며 집단으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합니다. 올림픽에 정치논리가 적용된 거죠.

당연히 크레믈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를 천명했습니다. 마침, 모스크바 다음 대회가 바로 미국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고,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에 의해 자국 올림픽 보이콧을 당한
소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복조치로 1984년 LA 올림픽의 보이콧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소련 중심의 동구권 국가들이 일제히 LA 올림픽을 거부한 거죠.

반 세기만의 올림픽 유치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게 되자 많은 미국인들이 크게 실망하고 또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은 예상 밖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역대 올림픽 사상 첫 흑자를 기록하였습니다. 250만 달러의 흑자를 낸 LA 올림픽의 성공은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올림픽으로 한 몫 잡아보자는 생각에 개최권을 따내려 경쟁하는 계기가 됩니다. 피터 우베로드는 바로 그 LA 올림픽의 조직위원장이었습니다.


1985년 - 덩 샤오핑Deng Xiaoping 1904. 8. 22 ~ 1997. 2. 19 (이미지 생략)

모름지기 천하의 대인배라면 올해의 인물에 한 번 선정되는 걸로는 부족한 법. 덩샤오핑 동지도 다시 한 번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다 죽어가던 거대한 이무기 중국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에 입각한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기간동안 그 기반이 많이 파괴되었다지만, 중국은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고, 시장이 매우 커서 경제발전의 요소는 충분했습니다.

중국은 80년대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경제는 몰라보게 쑥쑥 성장하기 시작했고 죽어가던 거대한 이무기는 용이 되어 승천할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고요. 그러면서도 그는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을 일컫어 "우리 실정에 알맞는 중국식 사회주의 찾기"라고 말했습니다. 말장난이긴 합니다만 이 중국식 사회주의는 이후 중국 정책의 핵심이 됩니다.

덩샤오핑에 의해 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마침내 세계의 대국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고 그 자리에 걸맞는 실력을 갖춰나가기 시작합니다. 떠오르는 용 중국, 그리고 그 중국을 되살려낸 지도자 덩샤오핑은 7년만에 다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됩니다.


1986년 - 코라손 아키노 Corazon Aquino 1933. 1. 25 ~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의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야당의 거물 정치인 베니그노 아키노의 평범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1983년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가 암살당한 후, 그는 남편의 유산을 이어받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필리핀 민중들을 등에 업으며 순식간에 야당의 유력 지도자이자 민주화 투사로 변모합니다.-정치 후진국에선 아내나 남편, 자식 등이 죽은 가족을 대신해 그 권력의 유산을 이어받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연합 후보로 나섰다가 패하였으나 선거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정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전 필리핀에서 일제히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반독재 민주 민중 항쟁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마르코스가 망명하고, 그녀가 새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인정받게 된 거죠.

오랜 기간에 걸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바로 독재 시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헌 논의를 시작하고, 개헌 법안이 나올때까지의 임시헌법을 공포하며 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드높은 열망이 승화되어 탄생한 아키노 정권의 미래는 밝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착각이었음이 드러나죠-_-;;)


핑백

덧글

  • 레인 2008/11/17 07:53 # 답글

    바웬사도 뒷통수를 멋지게 날려주셨...
  • Ladenijoa 2008/11/17 22:17 #

    바웬사가 대통령 된 후에는 역시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죠-ㅅ-
  • 행인1 2008/11/17 09:41 # 답글

    좀 핀트를 벗어나지만 사다트 암살사건 영상을 보았는데 정말 충격이더군요. 퍼레이드 하다가 갑자기 트럭에서 뛰어내리더니 두두두...
  • Ladenijoa 2008/11/17 22:17 #

    사다트 암살은 진짜 대놓고 막장국가다운 행태를 부린 거 아니겠습니까
  • 소시민 2008/11/17 10:47 # 답글

    1977년 : 그리고 사다트는 아랍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반대세력에 대한 강압통치를 펼쳐
    결국 암살당하죠
    1978년 :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의미있는 선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9년 : 이란혁명은 8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지죠. 바니 사드르같은 서구 유화파들이나 공
    산주의자들도 혁명의 대열에 있었지만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호메이니 옹 카리스마 넘쳐보이지 않습니까?
    1981년 : 7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폴란드 방문도 자유노조의 운동에 불을 붙인 계기라 하는
    군요.
    1983년 : 이렇게 심화되는 듯한 신냉전도 불과 2년 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과 재정
    적자에 시달린 레이건 정부의 방향전환으로 유화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되죠.
    1984년 : 웬지 무게감이 떨어져 보이는 선정이군요. 현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쟁쟁한
    지도자들 사이에 껴서 그런 듯 합니다 -_-
  • Ladenijoa 2008/11/17 22:19 #

    1977 : 그리고 사다트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 20년 넘게 철권 통치 중이죠-ㅅ-
    1978 : 예, 상당히 의미있는 적절한 선정이었습니다.
    1979 : 호메이니가 진짜 무서운 사람이죠. 카리스마도 나름 있었고 때문에 혁명세력 중에서도 반대 세력의 숙청이 쉬웠달까요.
    1981 : 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 출신이었죠 참
    1983 : 역시 시대는 매우 급변합니다. 단 2년만에-ㅅ-
    1984 : 대인배들 사이에 낀 평범한 사람이죠 ㅎㅎ
  • OTIKA 2008/11/17 10:55 # 답글

    '올해의 인물에 두 번이상 선정되기'가 '천하의 대인배 코스' 전공필수 과목이었군요(...)
  • Ladenijoa 2008/11/17 22:19 #

    유일한 예외는 총통각하!
  • 네비아찌 2008/11/17 14:24 # 답글

    1983년 말에는 나토의 'Able archer' 훈련 때문에 실제로 3차대전 발발 직전까지 갔었더랬죠. 특히 안드로포프 동지가 오늘내일 하던 때라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정말 위험했었더라고 합니다.
  • Ladenijoa 2008/11/17 22:20 #

    진짜 하마터면 전 태어나지도 못할 뻔 했습니다;;
  • 네비아찌 2008/11/18 00:40 #

    83년에 저는 국민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의 tv 뉴스에 'SS-20'과 '퍼싱-2', '백파이어 폭격기 극동배치'라는 단어가 자주 들리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도 저는 소련의 핵미사일 하면 SS-20이 토폴이나 사탄보다 먼저 떠오른답니다.
  • 함부르거 2008/11/17 17:10 # 답글

    이란의 융통성 있는 통치는 오히려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죠.^^;;; 원래 이슬람교가 상당히 융통성이 있으니까요. 다른 면으로 답답한 점도 있습니다만,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막장화를 보면 이란 방식도 쓸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Ladenijoa 2008/11/17 22:20 #

    이란이 진짜 이슬람 민주화의 대안이랄까요. 성직자들에 의한 입후보자 검열만 좀 없애면 더 좋겠지만;;
  • 윙후사르 2008/11/17 19:47 # 삭제 답글

    그러고 보니 대인배들은 최소 2번은 올랐군요. 아.. 그리고 이란은 사람들마다 이야기가 다른데 일부는 이슬람혁명이 이란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 함부르거님과 동일합니다. 적어도 비밀경찰은 없잖아요.
  • Ladenijoa 2008/11/17 22:21 #

    이란은 막장이 되었다기보단 이슬람식 모델을 만들었다고 봐야죠. 최소한 이슬람권에선 가장 민주적인 국가가 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전제군주국들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 윙후사르 2008/11/17 22:53 # 삭제

    근데 터키는 이슬람권으로 안치나요.. 개인적으로 중동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터키라고 생각합니다만...
  • 네비아찌 2008/11/18 00:38 #

    이란에는 비밀경찰은 없어졌지만 '종교경찰' 이 있지요.
    그리고 터키는 국부 아타투르크가 '군부의 정치 개입 권리'를 못박아놓아서 민간정부가 맘에 안들면 군부가 대놓고 겁주는 형국이지요. 몇년 전에도 이슬람 원리주의에 호의적인 정부가 들어서자 군부가 '원리주의 배격은 아타투르크의 유지'라며 쿠데타 하겠다고 압박했고요.
  • Ladenijoa 2008/11/18 07:21 #

    윙후사르 / 터키는 다른 아랍국가들과 일률적으로 같은 기준을 두고 보기에는 매우 힘든 나라라서 말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