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 전투

사실 이번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어째서 이오공감이 이오지마로 불리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이오공감과 이오지마는 이오라는 음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때문에 바로 이오지마로 불리지는 않지요.

이오공감 2.0은 1.0과 달리 회원들에 의한 자발적 추천/신고가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논쟁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때문에 핵심 논제가 생기면 관련 글들이 모두 추천되면서 이오공감이 대대적인 난상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이전까지 미군이 단일전투로는 최대 피해를 입었던 이오지마 전투가 이오공감 2.0에 비유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이오지마 전투를 가볍게 포스팅했습니다. 위키피디아나 2차대전 개론서에 나오는 수준으로;;

1. 배경
2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인류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던 1944년 6월 18일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동원 가능한 주력전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모 3척-타이호, 쇼카쿠, 히요-과 급유함 2척이 격침당하고 함재기 378기를 격추당했으며, 기타 항모 4척,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이 각각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로서 3일 전인 6월 15일의 사이판 상륙은 미국의 의도대로 되어갔고, 결국 7월에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 일대가 모두 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일본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의 태평양 중심축이 단번에 붕괴되었으며 마침내 개전 3년 8개월여만에 미국은 일본 본토로 가는 출구를 활짝 열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서부에서 이륙한 B-29의 규슈 폭격 등이 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발진하는 것과 도쿄 코앞에서 발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이판, 티니안, 괌 등 마리아나 제도의 모든 섬들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B-29 폭격기들이 도쿄를 강타한 거죠.

그런 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는 매우 골치아픈 존재였습니다. 몇 되지도 않는 일본 전투기들이 이곳에서 이륙해 사이판 등을 기습폭격하는 일이 있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도쿄 폭격을 위해 발진한 B-29 폭격기들의 이동루트 안에 들어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오지마를 미군이 점령한다면 사이판 등의 기지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완전 사라질 뿐더러, 이오지마라는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습의 와중에 피탄당한 폭격기들의 임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오지마는, 일본제국의 본토였습니다.

사실 이오지마는 19세기 말엽에야 일본 영토가 된 무인도였습니다만 이후 열대작물 재배나 어업 등으로 생활하는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대전기에는 약 1,000명 내외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했습니다. 행정적으로도 일본제국 도쿄도지사의 관할구역이었죠. 일본제국의 본토.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개전 이래 최초로 미 지상군 병력이 일본제국의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으며 일본도 본격적으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실제 일본은 개전 이래 전쟁의 참상을 본토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의 두리틀 폭격 이후로는 폭격받은 적도 없었지요. 본토에 대한 폭격이 재개된 건 1944년 6월 15일의 일이었고 그것도 규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다지 심한 수준도 아니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폭격이 부정확한 거였지만;;) 그런데 이제 절대국방권이 무너지고, 사이판에서 B-29가 도쿄 등을 공습하는 위기상황에 미 지상군이 일본제국 본토에 대한 강습까지 한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와 상징적 이유가 겹쳐지면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오지마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2. 이오지마 방어 준비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 忠道)는 개전시 27군 참모로 홍콩 공격에 참전했고, 이후 제국 육군 2사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4년 5월 27일, 그는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제국육군 109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109사단은 바로 이오지마와 보닌제도 방어전을 위한 사단이었죠. 떠나기 전 천황을 알현하여 하직인사를 올리고, 천황도 명예로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잘 알았던 거죠.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미군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계획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던 그는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을 지닌 미국을 상대로 뭔 발악을 해봤자 이길 수 없으며, 그렇다면 차라리 전 병력이 유의미하게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합니다.

유의미한 죽음이란 바로 최대한 많은 미군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것이었죠. 기존의 일본군은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유명한 만세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기관총과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미군에게 있어 아주 좋은 사격표적 수준이었죠. 그런데 타다미치는 자살돌격을 배제하고 이오지마 전체에 대한 요새화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이오지마의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개가 개시되었습니다. 애시당초 인원이 1,000명 내외라 소개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이후 타다미치 중장은 이오지마 각지에 그 악명높은 땅굴을 파고 참호를 건설했으며 곳곳에 엄폐호를 만들었습니다. 땅굴로 이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왠만한 포격, 폭격에도 끄덕 없었고 일본군은 이 땅굴을 따라 후방이나 적 배후로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3. 이오지마 포격
물량의 미군도 그야발로 무지막지했습니다. 우선 지상군은 해병 제3, 4, 5사단 3개로 구성된 해병대 제5수륙양용군단이었고 군단 총병력은 70,647명에 달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군은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병력의 3배에 달했습니다.-_-;; 이들을 위해 수송선 43척, LST 63척, LSM 3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지상군만 이 정도에다가 해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함 8척(-_-;;)과 순양함 19척, 구축함 44척이 선단 호위 및 함포지원을 위해 동행했고, 항공지원을 위한 호위항공모함도 12척에 달했습니다.

1945년 2월 16일부터, 전함 6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이오지마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에 나섰습니다. 17일에 수비대 해안포대의 포격을 당해 순양함 펜서콜라가 격침당했지만 포대도 곧 제압당했죠.

4. 이오지마 상륙
2월 19일 새벽 2시. 전함의 함포사격을 신호탄으로 다시 한 번 맹렬한 함포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포격이 섬 곳곳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진지는 잘 구축되어지고 또 지하에 있던 탓에 무사했고 포격에 노출되어 날아간 진지는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8시 59분을 기해 해병 제5군단이 섬의 남쪽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구리바야시의 지침대로 상륙을 허용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상륙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끝장내겠다는 전술이었고, 이 속임수를 눈치 못 챈 미군은 해군이 자기들 전공까지 다 해치웠다며 불만을 가지기도 했죠.

그리고 그들이 어느정도 전진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쏟아졌습니다. 잘 엄폐된 기관총 진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일본군 포병들도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병 5군단의 선두부대는 그야말로 경악할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미군을 구해준 건 공군이나 해군이 아니라 바로 전차였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티이거 만나면 바로 깨갱거리며 "공군!! 공군 어디있어!!" 하는 M4 셔먼 전차였습니다만 태평양 전선에선 입장이 전혀 달라져서 말도 안 되는 캐사기 킹왕짱 먼치킨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돌진해오는 전차들을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등으로 3~4대를 격파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였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포탄을 쏴제껴도 끄덕 없는 셔먼 전차에 놀라 패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유럽 전선에선 아마 독일군 대전차포 맞고 바로 뻗었을텐데;;)

결국 대전차포 중대장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 달려들어 자폭-_-;;;까지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먼 전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개척했고, 해병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기며 눈앞에 있던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루동안 5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 버렸지요;;

5. 수리바치 산 공략
상륙한 미 해병대의 당면 목표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자 최남단에 위치한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는 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수비대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었음에도 산 곳곳의 바위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결사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 덕에 해병대의 공격도 매우 치열했죠.

수리바치 산은 특히 바다에 접해 있어 해군 함포사격의 직격이 가능했다는 점은 일본군에게 불행이었습니다.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수리바치 산 방어에 어려움을 주었고, 육로로는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태우고, TNT로 바위를 통채로 무너트리며 진지 내의 일본군을 압사시키는 단순무식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방어가 어려워지자 일본군 생존자들은 전원 미군의 포위망을 은밀히 뚫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습니다.

2월 23일, 이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즉시 수리바치 산 정상을 확보했습니다. (10시 20분)
그런데 밑에서 보니 뭔가 불만입니다. 성조기가 작았던 거지요. 우리 졸라짱센 미쿡의 자랑스런 영광의 성조기가 저렇게 작고 볼폼없어서야 되겠냐... 해서 즉시 위 사진의 성조기보다 훨씬 크고 알흠다운 새로운 성조기를 공수합니다. 마침 이 모습을 AP의 종군기자가 촬영했죠.
이것이 그 유명한 시대의 떡밥입니다. 이 떡밥은 이후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변에 조형물로 제작되기도 하죠.

6. 이오지마 북부
그러나 정작 전투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오지마 남단은 미군이 무사히 확보했습니다만 일본군의 주 방어선은 섬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오지마를 완전히 보하기 위해서 미군은 섬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휘하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미 미군은 수리바치 산이라는 교과서를 배워 왔습니다. 일본군은 매우 튼튼한 동굴진지로 도배를 하며 미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했습니다만 구리바야시 중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진지를 골치아프게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발견하는 진지 입구마다 TNT 폭약을 설치, 폭파시켜 입구를 무너트리고 진지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역시 화염방사기. 보이는 입구마다 화염방사기를 맨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최대출력으로 화염을 내뿜었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일본군은 통구이가 됩니다.(...) 그걸로 부족해 수류탄을 집어넣고 다시 TNT를 터트리고 하니 일본군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졌죠.

그러나 여전히 미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지지부진한 진격이었습니다. 섬 북부 전역을 관측할 수 있는 382 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계속 패퇴하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함락할 수 있었죠. 그래도 미군은 3월 9일, 일부 병력이 북부 해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군은 섬의 최북단 일부로 패퇴해 그 은신처가 매우 좁혀졌습니다. 미군은 늘 하던대로 화염방사기, 수류탄, TNT를 있는 대로 쏟아부으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죠.

결국 일본군은 3월 26일 잔존병력 전원이 매우 제국군스럽게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최후의 반자이 어택 참가자 전원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반자이 어택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본 애들은 최후의 반자이 어택때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믿고 있습니다만-_-;;

7. 이오지마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에서 무려 6,821명의 전사자와 19,18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최일선에 섰던 소부대들 중에는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한 부대들이 속출했지요. 일본은 제국육군 109사단이 말 그대로 전멸했습니다.

미군으로선 이전까지 가장 끔직했던 1943년의 타라와 전투를 가볍게 능가하는 대규모 인명피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지독한 일본놈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지요. 실제 이오지마 전투 당시 구리바야시 중장의 방어계획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에서도 고스란히 채택됩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충분히 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B-29의 발진기지인 사이판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커티르 르메이에 의한 일본 본토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는 더더욱 커졌는데 공습 도중 피탄당한 기체들이 이오지마의 비상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상당한 수의 B-29 폭격기들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절대국방권 붕괴에 뒤이어 제국 본토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이제 일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본토대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by Ladenijoa | 2008/12/22 16:59 | History | 트랙백(3) | 덧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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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인글: 태평양 전쟁; 원자탄과 전범 재판평소 이 블로그에 자주 방문해주시는 어부님께서 과제를 내 주셨더군요. ^^ 그간 기말고사 기간인데다가 저 어려운 질문에 답을 하기엔 제 실력이 워낙 모자라서 다른 분들의 고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트랙백이 달리지를 않길래 미숙하나마 제가 먼저 원자탄 투하에 대해서만 글을 작성해 보기로 했습니다. 주제 자체가 워낙 논란거리인 데다가 여러 관점이 복합적으로 얽힌 주제라 단 한 번에 글을......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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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제목 없음 in 계원필경 at 2008/12/22 20:52

제목 : 라뎅님을 위한 이오공감(이 아닌 이오지마) 지도 올림
이오지마 전투니마(?)에서 제공하는 사진입죠(...)...more

Commented by ViceRoy at 2008/12/22 17:12
이오지마 전투라길래 이오공감에서 무슨 일 났나 했더니 진짜 이오지마 전투-_-;;;;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2
낚이셨군요 데굴데굴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8/12/22 17:13
언제나 잘 읽고 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륙군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전진배치식(타라와의 사례)이 정석으로 선호되는 가운데에서 거점 방어 중시 및 1차 상륙을 허용하고도, 우세한 적을 상당기간 동안 저지했다는 점에서 나름 주목해볼만한 전투라 봅니다.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3
전진배치식은 해군 함포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문제가 있죠. 상륙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기는 하지만...

여튼 상륙전이 주축일 수 밖에 없는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가장 곤란했던 게 저런 도서 상륙전이었으니 일본 본토 진공을 망설일 법 하죠
Commented by 행인1 at 2008/12/22 17:17
이오지마 함락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군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3
미군이 접수한 최초의 일본 본토라는 그 상징이 매우 크죠
Commented by 윙후사르 at 2008/12/22 17:36
일본군 고위 간부 중에서는 몇 안되는 개념인이 맡는 바람에 피해가 크긴 컸네요. 뭐... 그래봤자 물량의 미국.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4
사실 전시 미군 최대동원병력 1,500만에 비하면 이오지마 전투의 6,000명은 그다지 큰 피해도 아니죠.

그러나 그런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던 미군이기에 국내여론이 매우 안 좋게 돌아갔다는 게 치명적이지요.
Commented by organizer at 2008/12/22 17:44
깃발이 - 작아서 - 맘에 안 들어, 큰 걸로 재공수를 하다니.... <--- 진정 대국!!!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4
미국은 무시무시한 나라이지요 ㅎㅎ
Commented by rumic71 at 2008/12/22 17:46
6월 18일의~ 뒤에 전투 이름이 빠진 듯한데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5
예 지금 막 수정했습니다.

해당 해전은 아시겠지만 마리아나 해전인데, 아마 이런 대규모 해전을 보는건 앞으로 어려울 듯 합니다.
Commented by BigTrain at 2008/12/22 17:50
예전 글에 태평양 전쟁 말기 상황에 대해 다룬 글이 있어서 트랙백을 보냅니다.

이오지마와 그 뒤의 오키나와는 보면 볼수록 ㄷㄷㄷ합니다. -_ㅜ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5
일본 본토 상륙이 이루어졌으면 아마 일본 민족이 말살되었겠죠;;
Commented by 곤충 at 2008/12/22 18:24
고립된 섬이 저정도인데, 본토상륙했으면 정말 1억 총옥쇄가 펼쳐졌겠죠.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18:26
말이 좋아 총옥쇄지 상륙 직전에 굶어죽을 사람 많을 겁니다-ㅅ-
Commented by 계원필경 at 2008/12/22 18:43
아버지의 깃발을 봤는데 1949년까지 저항한 일본군에서...;;;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0:45
괌에 숨어 살다가 70년대 발견된 일본군도 있습니다(머엉)
Commented by dunkbear at 2008/12/22 19:24
오키나와는 더 참혹했을 겁니다. 민간인들이 이오지마보다더 더 많았을테니...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0:45
오키나와에선 아예 민간인 소개도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오지마야 민간인 다 소개하고 시작한 전투지만...
Commented by 세뇌 at 2008/12/22 20:41
아버지의 깃발이 이 전투를 배경으로했던거군요..
영화 내용중 남는건 저 장면뿐이네요 ^^;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0:46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아버지의 깃발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참 좋다고 하던데 전 아버지의 깃발밖에 못봐서;;
Commented by 컴터다운 at 2008/12/22 20:50
이오공감 배틀양상을 보러 온 저는 낚인 건가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0:53
사실 낚시 의도는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낚시성 포스팅이 되었군요;;
Commented by 울트라김군 at 2008/12/22 20:57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참 인상깊었죠.
작전을 전개하면서 그걸 수행할 부대가 조금 밀리자 마자 수류탄 까고 자결[...]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2:58
일본은 진짜 너무 무의미하게 귀중한 병사들을 희생시켰죠...
Commented by   at 2008/12/22 21:06
우왕. 잘 보고 갑니다 :)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2:58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joyce at 2008/12/22 21:23
패러디가 식상해지면 진짜가 오는 거군요 :)
잘 보았습니다.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2:59
감사합니다^^ 이오지마 이오지마 하면서 정작 이오지마에 대해 잘 모르시는 거 같아서 한 포스팅이었습니다 ㅎㅎ
Commented by 네즈 at 2008/12/22 21:24
처음으로 이오지마 전투가 실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2:59
그런 분이 좀 계시더라구요. 이오지마 전투가 국내엔 잘 안 알려줘서...
Commented by 미스트 at 2008/12/22 21:57
유럽 전선에선 티이거 만나면 바로 깨갱거리며 "공군!! 공군 어디있어!!" 하는 M4 셔먼 전차였습니다만 ... Y-Y


..... ....일본의 치하 중전차 같은걸 만나면 관계 역전....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3:00
일본 전차 상대로는 말 그대로 먼치킨이죠-ㅅ-
Commented by 에르네스트 at 2008/12/23 11:19
태평양에서는 진짜로 쏴봐라! 뚫리냐? 막아보아라! 막히냐? 상태였죠뭐~ (76mm셔먼이 태평양에는 늦게 보급되었는데 그이유가 75mm만 가지고도 적전차는 펑펑 날아가는데 76mm가 필요있나? 였으니 말입니다~)
Commented by OTIKA at 2008/12/22 22:00
참으로 무서운 유황도 전투(...)
그러고보니 전차 얘기는 유머글과 일본제 웹코믹(치하땅-_-) 같은 거에서 봤던 기억이;;;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3:00
그 유머글 내용이 좀 과장섞이긴 했어도 상당부분 사실일 겁니다-ㅅ-
Commented by 저거노트 at 2008/12/22 22:07
그런데 일본의 대전차포 또한 기준 미달의 성능인 것 같군요. 하긴 그 당시 일본의 전차도 마찬가지지만..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3:02
일본은 대체 잘 만든게 뭐일까요-ㅅ-;; 대전 초반부에는 그래도 항공기라도 우수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안 되었으니;;

독일은 대전 말엽이 되어도 전차 등 지상군 장비나 일부 항공기는 여전히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고 보는데 그마저도 안되는 일본이 진짜 의지할 수 있는건 그 빌어먹을 가미카제 뿐이었으니...
Commented by 개발부장 at 2008/12/22 23:51
[구일본군 약소열전]에 따르면 대전 초반 항공기도 기준 미달... 로 주장하고 있지요--;;
배군님께서 하신 말이었던가, 만일 일본이 2차대전에서 별 피해없이 종전해버리면 표준화나 공업화 등 자신들의 약점을 깨닫지 못해 그 이후의 경제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에르네스트 at 2008/12/23 11:27
일본군 대전차포(치하(개)에도 달린 47mm)가.... 대충 독일제 37mm수준이었다고 합니다
(100M에서 수직장갑60mm관통...)
(그에 맞서는 미군 셔먼은 75mm버전도 100M기준 100mm 76mm버전은 130mm)
대체적으로 평이 3년전(39년쯤이면 치하(개)버전도 평균수준은 되던 시절)이었으면 먹혔겠지~ 판입니다.
Commented by 소독제 at 2008/12/22 22:19
미군은 6000여명이 죽었다지만 일본군은 22000이 죽었다는...;
한마디로 미군은 엄청난 효율로 일본군을 격파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일본군이 일구어냔 최대의 효율이라고 하더군요(대략 3:1)....;;;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2 23:03
전사자 비율로 따지면 1:3입니다만 전투 복귀가 불가능한 중상자를 다 포함하면 그 비율이 줄어듭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승리를 거둔 건 분명합니다.

문제는, 미국이 단일 전투에서 그런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는 거고, 때문에 국내여론은 상당히 싸늘했다는 겁니다. 전사자 문제는 정치권이나 군 지휘부에게나 큰 부담이었고, 만약 본토 결전이 단행될 경우 예상되는 전사자 숫자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이유 중 하나였지요.
Commented by Earthy at 2008/12/22 23:13
109사단이 전멸하는 동안...
어떻게 보면 사단의 1/3도 못 처리했다는 것도 참...
방어자는 무조건 공격자보다 유리하다는 걸 물량만으로 깨부수는 미군이 진짜 무섭네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27
미군 전력의 1/3을 처리했다고 봐야 합니다. 중상자들도 죄 감안해야지요
Commented by KAZAMA at 2008/12/22 23:35
일본육군 무기체계가 ㅄ이라서 어쩔수 없이 털리게 되는 전투입니다(이러나 저러나)

도대체가 이해할수 없는 무기체계를 가진 군대였으니까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27
뭐 그 상황 속에서 나름 선전한 건 사실이니까요
Commented by USAF at 2008/12/23 00:20
타다미찌의 옥쇄
끔찍하고 무서운 전투였지만 훌륭한 전략전술로 끈질기게 본토폭격시간을 줄이고 한달만에 2차대전중 최대사상자를 낸 뛰어난 장군이죠
당시 일본육군중에 제일 진보적인 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28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죠. 저런 곳에서 헛되이 죽어야 했다는 게 매우 안타까운 사람...
Commented by 이네스 at 2008/12/23 01:07
... 셔먼이 박살이 안나. 로군요.

참 이해할수없는 왜놈들입니다.. ㅡㅡ;;;


그리고 미쿡의 변태적 보급과 물량은 진리!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28
M4도 아니고 M3을 노획해서 자기네 전차 주포도 영거리사격 테스트 했는데 격파 안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죠(...)
Commented by 지나가던이 at 2008/12/23 03:51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도 꽤 재미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과 한 젊은 병사의 시각에서 스토리가 진행되지요. 일본 찬양하는 느낌도 없던데 개봉했어도 괜찮았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물론, 내용을 떠난 문제였지만.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29
아버지의 깃발(미국)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일본)가 양측 시각에 따른 영화인데 둘을 잘 섞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Commented by gmmk11 at 2008/12/23 06:14
해병대의 희생에 비해 비상착륙한 B-29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이오지마 왜 점령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30
확실히 비상착륙한 B-29의 숫자는 적은 편이죠. 그러나 이오지마 발진 전투기에 의한 중도 요격 가능성이 사라진 점이랑, 역시 이오지마 발진 전투기에 의한 사이판 공격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Commented by 홍차도둑 at 2008/12/23 08:44
제가 가지고 있던 자료에서는 쿠리야바시 중장은 작전 시작과 함께 고립되었고 그 이후에 제국에 보내는 마지막 무전 이후 할복한 것으로 압니다. 다만 그 시점이 약간 모호한 것이, 미군이 상륙 직후 부대원들과의 통신이 고립되었고 반자이 돌격은 이미 북쪽까지 내몰렸을때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알아서 판단해서 하라고 이미 세세한 지시가 다 내려진 뒤였다더군요.

그러나 역시 저놈의 크고 알흠다운 성조기란....저걸 찍은 종군기자가 '캐사기 사진'찍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난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찍었을 뿐이라구요~"
라는 사실을 말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ㅎㅎ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31
일본군이 거의 다 전멸해서 정확한 걸 알수가 없죠. 이건 뭐 영원히 확실히 규명되지 않을 문제...

그러고보니 그 문제의 성조기 박물관에 전시중이던가요-ㅅ-
Commented by 이등 at 2008/12/23 10:21
그러니까 이글루스판 이오지마는 이글루 유저들의 심층에 깔려있던 입지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불씨가 최초로 이글루스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비슷하군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32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Commented by Cuchulainn at 2008/12/23 11:34
... 역시나 더러운 물량 [...]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3:30
미국의 물량에 누가 개기겠습니까-_-;;
Commented by dameh at 2008/12/23 14:16
잘 봤습니다. 쿠리바야시라면 갈릴레오의 그 무능한 쿠리바야시만 떠올랐었는데 이거 반성해야겠군요(;)

일전에 소방서근무할때 70년대 출판된 2차대전 관련 출판물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오지마 관련 사진으로 드레스덴만큼이나 소사체가 많이 보였던게 다 그 화염방사기 때문이었나..싶기도 하네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9:02
아주 제대로 화염방사에 통구이된 일본군이 많죠. 이오지마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오키나와에서도...
Commented by 아이스맨 at 2008/12/23 18:55
성조기는 처음껄 [대대기념품]으로 꼬불치려고 한 대대장이 빼돌린거지. 그래다보니 더큰 성조기가 2번째로 올라간 거고, 찍사였던 조 로젠탈(AP기자)조차 사진찍을 당시에는 "저거 뭥미?"하는 정도였으니까.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3 19:03
ㅋㅋㅋ 역시 미쿤이랄까요
Commented by 페리 at 2008/12/23 21:46
저도 이오공감에 관한 이야긴줄알았는데 진짜이오지마 전투...;;
아니 그이전에 이오지마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고 실제로 있던 이름이로군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4 14:40
예 첫 발음이 비슷해서 이오공감을 이오지마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모르는 분들이 좀 되시더군요
Commented by StarSeeker at 2008/12/24 11:1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로 접했는데...

일본을 피해자라고 미화시킨 감이 약간은 있지만, 그래도, 영화로써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사들을 잘 대우해주던 타다미치장군(기병장교 누구였더라? 그 사람도 참 인간적으로 그려진...)이나, (걔중에는 자폭을 강요하는 장교들과 자폭을 하는 얘들도있지만)살고 싶어하는 병사들을 보면 말이죠.

전쟁이라는게 참...끔찍하다는게 들더군요.
Commented by Ladenijoa at 2008/12/24 14:43
뭐, 멍청한 수뇌부의 개전결정때문에 전선으로 끌려가 헛되이 죽어야 했던 일본군들도 피해자이기는 하죠. 109사단은 침공군도 아니고 본토 방어부대였으니 전쟁범죄에서도 나름 자유로울 듯 합니다. 오키나와 전투처럼 민간인을 학살한 것도 아니고...

기병 장교라면 니시 남작이겠군요. 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 출신...

여튼 이오지마를 다룬 두 영화는 진짜 전쟁의 참혹성을 잘 보여준다고 명성이 높습니다. 전 아직 아버지의 깃발밖에 못봐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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