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2일
이오지마 전투
사실 이번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어째서 이오공감이 이오지마로 불리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였습니다. 일단 이오공감과 이오지마는 이오라는 음절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때문에 바로 이오지마로 불리지는 않지요.
이오공감 2.0은 1.0과 달리 회원들에 의한 자발적 추천/신고가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논쟁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도 하고 때문에 핵심 논제가 생기면 관련 글들이 모두 추천되면서 이오공감이 대대적인 난상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이전까지 미군이 단일전투로는 최대 피해를 입었던 이오지마 전투가 이오공감 2.0에 비유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이오지마 전투를 가볍게 포스팅했습니다. 위키피디아나 2차대전 개론서에 나오는 수준으로;;
1. 배경
2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인류 최대의 해전이기도 했던 1944년 6월 18일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제국 연합함대는 동원 가능한 주력전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항모 3척-타이호, 쇼카쿠, 히요-과 급유함 2척이 격침당하고 함재기 378기를 격추당했으며, 기타 항모 4척,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이 각각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로서 3일 전인 6월 15일의 사이판 상륙은 미국의 의도대로 되어갔고, 결국 7월에 사이판과 티니안 등 마리아나 제도 일대가 모두 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일본 대본영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의 태평양 중심축이 단번에 붕괴되었으며 마침내 개전 3년 8개월여만에 미국은 일본 본토로 가는 출구를 활짝 열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4일,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서부에서 이륙한 B-29의 규슈 폭격 등이 있었습니다만 중국에서 발진하는 것과 도쿄 코앞에서 발진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사이판, 티니안, 괌 등 마리아나 제도의 모든 섬들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B-29 폭격기들이 도쿄를 강타한 거죠.
그런 미군 입장에서 이오지마는 매우 골치아픈 존재였습니다. 몇 되지도 않는 일본 전투기들이 이곳에서 이륙해 사이판 등을 기습폭격하는 일이 있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도쿄 폭격을 위해 발진한 B-29 폭격기들의 이동루트 안에 들어있다는 것도 문제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이오지마를 미군이 점령한다면 사이판 등의 기지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완전 사라질 뿐더러, 이오지마라는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습의 와중에 피탄당한 폭격기들의 임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오지마는, 일본제국의 본토였습니다.
사실 이오지마는 19세기 말엽에야 일본 영토가 된 무인도였습니다만 이후 열대작물 재배나 어업 등으로 생활하는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대전기에는 약 1,000명 내외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했습니다. 행정적으로도 일본제국 도쿄도지사의 관할구역이었죠. 일본제국의 본토. 이것이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습니다. 개전 이래 최초로 미 지상군 병력이 일본제국의 본토에 상륙하는 것이었으며 일본도 본격적으로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는 선언이었으니까요.
실제 일본은 개전 이래 전쟁의 참상을 본토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의 두리틀 폭격 이후로는 폭격받은 적도 없었지요. 본토에 대한 폭격이 재개된 건 1944년 6월 15일의 일이었고 그것도 규슈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다지 심한 수준도 아니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폭격이 부정확한 거였지만;;) 그런데 이제 절대국방권이 무너지고, 사이판에서 B-29가 도쿄 등을 공습하는 위기상황에 미 지상군이 일본제국 본토에 대한 강습까지 한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와 상징적 이유가 겹쳐지면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오지마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2. 이오지마 방어 준비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 忠道)는 개전시 27군 참모로 홍콩 공격에 참전했고, 이후 제국 육군 2사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4년 5월 27일, 그는 수상 도조 히데키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제국육군 109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109사단은 바로 이오지마와 보닌제도 방어전을 위한 사단이었죠. 떠나기 전 천황을 알현하여 하직인사를 올리고, 천황도 명예로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습니다.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잘 알았던 거죠.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은 미군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계획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었던 그는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을 지닌 미국을 상대로 뭔 발악을 해봤자 이길 수 없으며, 그렇다면 차라리 전 병력이 유의미하게 싸우다 죽자는 생각을 합니다.
유의미한 죽음이란 바로 최대한 많은 미군을 저승길 동반자로 삼는 것이었죠. 기존의 일본군은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유명한 만세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기관총과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미군에게 있어 아주 좋은 사격표적 수준이었죠. 그런데 타다미치는 자살돌격을 배제하고 이오지마 전체에 대한 요새화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이오지마의 민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개가 개시되었습니다. 애시당초 인원이 1,000명 내외라 소개 자체는 어렵지 않았죠. 이후 타다미치 중장은 이오지마 각지에 그 악명높은 땅굴을 파고 참호를 건설했으며 곳곳에 엄폐호를 만들었습니다. 땅굴로 이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왠만한 포격, 폭격에도 끄덕 없었고 일본군은 이 땅굴을 따라 후방이나 적 배후로 쉽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3. 이오지마 포격
물량의 미군도 그야발로 무지막지했습니다. 우선 지상군은 해병 제3, 4, 5사단 3개로 구성된 해병대 제5수륙양용군단이었고 군단 총병력은 70,647명에 달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미군은 수비를 맡고 있는 일본군 병력의 3배에 달했습니다.-_-;; 이들을 위해 수송선 43척, LST 63척, LSM 31척이 투입되었습니다.
지상군만 이 정도에다가 해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함 8척(-_-;;)과 순양함 19척, 구축함 44척이 선단 호위 및 함포지원을 위해 동행했고, 항공지원을 위한 호위항공모함도 12척에 달했습니다.
1945년 2월 16일부터, 전함 6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6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이오지마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에 나섰습니다. 17일에 수비대 해안포대의 포격을 당해 순양함 펜서콜라가 격침당했지만 포대도 곧 제압당했죠.
4. 이오지마 상륙
2월 19일 새벽 2시. 전함의 함포사격을 신호탄으로 다시 한 번 맹렬한 함포사격이 퍼부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포격이 섬 곳곳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진지는 잘 구축되어지고 또 지하에 있던 탓에 무사했고 포격에 노출되어 날아간 진지는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정도 전진하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집중 사격이 쏟아졌습니다. 잘 엄폐된 기관총 진지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일본군 포병들도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해병 5군단의 선두부대는 그야말로 경악할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미군을 구해준 건 공군이나 해군이 아니라 바로 전차였습니다. 유럽 전선에선 티이거 만나면 바로 깨갱거리며 "공군!! 공군 어디있어!!" 하는 M4 셔먼 전차였습니다만 태평양 전선에선 입장이 전혀 달라져서 말도 안 되는 캐사기 킹왕짱 먼치킨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돌진해오는 전차들을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등으로 3~4대를 격파했습니다만 그게 전부였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포탄을 쏴제껴도 끄덕 없는 셔먼 전차에 놀라 패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유럽 전선에선 아마 독일군 대전차포 맞고 바로 뻗었을텐데;;)
결국 대전차포 중대장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전차에 달려들어 자폭-_-;;;까지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먼 전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개척했고, 해병대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기며 눈앞에 있던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루동안 5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 버렸지요;;
5. 수리바치 산 공략
상륙한 미 해병대의 당면 목표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자 최남단에 위치한 수리바치 산을 공략하는 거였습니다.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수비대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었음에도 산 곳곳의 바위들을 교묘히 이용하며 결사적인 방어전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 덕에 해병대의 공격도 매우 치열했죠.
수리바치 산은 특히 바다에 접해 있어 해군 함포사격의 직격이 가능했다는 점은 일본군에게 불행이었습니다. 함포사격은 일본군의 수리바치 산 방어에 어려움을 주었고, 육로로는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로 진지를 태우고, TNT로 바위를 통채로 무너트리며 진지 내의 일본군을 압사시키는 단순무식한 효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방어가 어려워지자 일본군 생존자들은 전원 미군의 포위망을 은밀히 뚫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습니다.
2월 23일, 이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즉시 수리바치 산 정상을 확보했습니다. (10시 20분)


6. 이오지마 북부
그러나 정작 전투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오지마 남단은 미군이 무사히 확보했습니다만 일본군의 주 방어선은 섬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고, 이오지마를 완전히 보하기 위해서 미군은 섬 북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휘하에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미 미군은 수리바치 산이라는 교과서를 배워 왔습니다. 일본군은 매우 튼튼한 동굴진지로 도배를 하며 미군에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했습니다만 구리바야시 중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진지를 골치아프게 하나하나 점령하는 대신, 발견하는 진지 입구마다 TNT 폭약을 설치, 폭파시켜 입구를 무너트리고 진지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역시 화염방사기. 보이는 입구마다 화염방사기를 맨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최대출력으로 화염을 내뿜었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일본군은 통구이가 됩니다.(...) 그걸로 부족해 수류탄을 집어넣고 다시 TNT를 터트리고 하니 일본군 방어선은 빠르게 무너졌죠.
그러나 여전히 미 해병대 입장에서는 매우 지지부진한 진격이었습니다. 섬 북부 전역을 관측할 수 있는 382 고지 전투에서 미군은 계속 패퇴하다가 마지막에야 간신히 함락할 수 있었죠. 그래도 미군은 3월 9일, 일부 병력이 북부 해안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군은 섬의 최북단 일부로 패퇴해 그 은신처가 매우 좁혀졌습니다. 미군은 늘 하던대로 화염방사기, 수류탄, TNT를 있는 대로 쏟아부으며 일본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죠.
결국 일본군은 3월 26일 잔존병력 전원이 매우 제국군스럽게 반자이 어택을 감행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최후의 반자이 어택 참가자 전원이 죽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반자이 어택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본 애들은 최후의 반자이 어택때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믿고 있습니다만-_-;;
7. 이오지마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섬에서 무려 6,821명의 전사자와 19,189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최일선에 섰던 소부대들 중에는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한 부대들이 속출했지요. 일본은 제국육군 109사단이 말 그대로 전멸했습니다.
미군으로선 이전까지 가장 끔직했던 1943년의 타라와 전투를 가볍게 능가하는 대규모 인명피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지독한 일본놈들이라고 혀를 내둘렀지요. 실제 이오지마 전투 당시 구리바야시 중장의 방어계획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에서도 고스란히 채택됩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는 충분히 그 값어치가 있었습니다. B-29의 발진기지인 사이판은 더 이상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커티르 르메이에 의한 일본 본토 대공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가치는 더더욱 커졌는데 공습 도중 피탄당한 기체들이 이오지마의 비상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면서 상당한 수의 B-29 폭격기들과 승무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절대국방권 붕괴에 뒤이어 제국 본토가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이제 일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본토대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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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12/22 16:59 | History | 트랙백(3) | 덧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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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상륙군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전진배치식(타라와의 사례)이 정석으로 선호되는 가운데에서 거점 방어 중시 및 1차 상륙을 허용하고도, 우세한 적을 상당기간 동안 저지했다는 점에서 나름 주목해볼만한 전투라 봅니다.
여튼 상륙전이 주축일 수 밖에 없는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이 가장 곤란했던 게 저런 도서 상륙전이었으니 일본 본토 진공을 망설일 법 하죠
그러나 그런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던 미군이기에 국내여론이 매우 안 좋게 돌아갔다는 게 치명적이지요.
해당 해전은 아시겠지만 마리아나 해전인데, 아마 이런 대규모 해전을 보는건 앞으로 어려울 듯 합니다.
이오지마와 그 뒤의 오키나와는 보면 볼수록 ㄷㄷㄷ합니다. -_ㅜ
영화 내용중 남는건 저 장면뿐이네요 ^^;
작전을 전개하면서 그걸 수행할 부대가 조금 밀리자 마자 수류탄 까고 자결[...]
잘 보았습니다.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 ....일본의 치하 중전차 같은걸 만나면 관계 역전....
그러고보니 전차 얘기는 유머글과 일본제 웹코믹(치하땅-_-) 같은 거에서 봤던 기억이;;;
독일은 대전 말엽이 되어도 전차 등 지상군 장비나 일부 항공기는 여전히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고 보는데 그마저도 안되는 일본이 진짜 의지할 수 있는건 그 빌어먹을 가미카제 뿐이었으니...
배군님께서 하신 말이었던가, 만일 일본이 2차대전에서 별 피해없이 종전해버리면 표준화나 공업화 등 자신들의 약점을 깨닫지 못해 그 이후의 경제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100M에서 수직장갑60mm관통...)
(그에 맞서는 미군 셔먼은 75mm버전도 100M기준 100mm 76mm버전은 130mm)
대체적으로 평이 3년전(39년쯤이면 치하(개)버전도 평균수준은 되던 시절)이었으면 먹혔겠지~ 판입니다.
한마디로 미군은 엄청난 효율로 일본군을 격파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일본군이 일구어냔 최대의 효율이라고 하더군요(대략 3:1)....;;;
문제는, 미국이 단일 전투에서 그런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는 거고, 때문에 국내여론은 상당히 싸늘했다는 겁니다. 전사자 문제는 정치권이나 군 지휘부에게나 큰 부담이었고, 만약 본토 결전이 단행될 경우 예상되는 전사자 숫자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이유 중 하나였지요.
어떻게 보면 사단의 1/3도 못 처리했다는 것도 참...
방어자는 무조건 공격자보다 유리하다는 걸 물량만으로 깨부수는 미군이 진짜 무섭네요.
도대체가 이해할수 없는 무기체계를 가진 군대였으니까요
끔찍하고 무서운 전투였지만 훌륭한 전략전술로 끈질기게 본토폭격시간을 줄이고 한달만에 2차대전중 최대사상자를 낸 뛰어난 장군이죠
당시 일본육군중에 제일 진보적인 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이해할수없는 왜놈들입니다.. ㅡㅡ;;;
그리고 미쿡의 변태적 보급과 물량은 진리!
이오지마 왜 점령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놈의 크고 알흠다운 성조기란....저걸 찍은 종군기자가 '캐사기 사진'찍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난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찍었을 뿐이라구요~"
라는 사실을 말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ㅎㅎ
그러고보니 그 문제의 성조기 박물관에 전시중이던가요-ㅅ-
일전에 소방서근무할때 70년대 출판된 2차대전 관련 출판물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오지마 관련 사진으로 드레스덴만큼이나 소사체가 많이 보였던게 다 그 화염방사기 때문이었나..싶기도 하네요(;)
아니 그이전에 이오지마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고 실제로 있던 이름이로군요;;;
일본을 피해자라고 미화시킨 감이 약간은 있지만, 그래도, 영화로써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사들을 잘 대우해주던 타다미치장군(기병장교 누구였더라? 그 사람도 참 인간적으로 그려진...)이나, (걔중에는 자폭을 강요하는 장교들과 자폭을 하는 얘들도있지만)살고 싶어하는 병사들을 보면 말이죠.
전쟁이라는게 참...끔찍하다는게 들더군요.
기병 장교라면 니시 남작이겠군요. 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 출신...
여튼 이오지마를 다룬 두 영화는 진짜 전쟁의 참혹성을 잘 보여준다고 명성이 높습니다. 전 아직 아버지의 깃발밖에 못봐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