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륙에서 벌어진 7년전쟁 이야기 (4) History

3대륙에서 벌어진 7년전쟁 이야기 (1)
3대륙에서 벌어진 7년전쟁 이야기 (2)
3대륙에서 벌어진 7년전쟁 이야기 (3)에서 이어지는 연재 포스팅입니다.

이번에는 북미 전역으로 가보겠습니다. 사실 북미전역,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7년전쟁 공식 개전인 1756년 이전부터, 사실상 1754년부터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습니다. 뉴잉글랜드와 뉴프랑스 식민지의 확대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이에 양측의 식민지 군대와 민병대, 인디언 동맹들이 결합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죠. 보통은 프랑스가 영국군을 털어먹고 있었습니다만-_-;;

그리고 1756년 본국에서 서로 양국에 선전포고하자 북아메리카 전역도 더욱 격화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매우 중히 여기고 있었고 서로 식민지에 병력과 물자를 증파하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양국 동인도회사의 충돌에 불과했던 인도 전역과 달리, 북아메리카 전역은 양국 중앙정부가 깊숙히 개입한 승부처였던 거지요.

특히 대영제국의 총리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서 북아메리카 전역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영국의 북아메리카 관심도는 매우 높아집니다. 프랑스도 물러서지 않았죠.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7년전쟁 당시 대영제국의 수상. 전쟁에서 북미 전역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여 결국 승리로 이끌어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영국 내각을 이끌었던 아들 피트(小피트)와 구분하기 위해 大피트로 불린다.

한편, 양국의 전쟁은 그 동맹들에게까지 휘말렸습니다. 우선,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기로 소문난 5개 부족의 연맹체, 이로쿼이 연맹은 오래 전부터 유럽인들과 교역하며 무시 못할 세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 전쟁에서는 영국편을 들었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의 주 교역상대가 영국이었거든요.

반대로 프랑스의 동맹부족들은 이로쿼이의 기세에 눌려살던 다른 군소 부족들 대부분이 가담했습니다. 알공킨(Algonquin), 레나페(Lenape), 와이언도트(Wyandot), 오지브와(Ojibwa), 오타와(Ottawa), 쇼니(Shawnee), 믹맥(Mi'kmaq) 등이 바로 그들이죠. 프랑스는 이들과 예전부터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들 부족들은 이로쿼이 연맹과의 대립축 속에 프랑스에 가담하여 영국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주요 전장

본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북아메리카 전선도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증원병력 일부와 함께 북아메리카 전역을 지휘할 루이 죠셉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을 파견합니다. 몽캄 장군은 현지에 도착하고 지휘권을 잡자마자 즉각적인 전면 공세로 전환합니다.

루이 죠셉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1756년부터 북미 프랑스군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폴란드 및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으나 그의 군사적 능력은 북미전역에서 빛을 발휘했다. 1756~58년은 그의 최전성기였으며 그의 지휘하에 프랑스 군은 늘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제해권 상실로 인한 본국의 지원 부족은 그도 어찌할 수 없었다. 프랑스인 치고는 매우 유능했고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던 장군.

8월 10일~14일에 걸친 포트 오스웨고(Fort Oswego)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요새를 함락시키고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 요새는 영국-프랑스 식민지 경계쪽에 위치했고 아울러 온타리오 호반에 접해 있었죠. 오스웨고의 함락은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위협을 크게 감소시키고 온타리오 호에서의 영국측 선박 통행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군사적으론 북미에서 처음 일어난 유럽식 포위공성전이란 측면도 있지요.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겨울을 보내고 난 뒤 몽캄의 프랑스 군은 병력을 재정비해 다시 공세에 나섰습니다. 1757년 8월, 인디언 동맹군까지 합쳐 약 1만여 명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나선 몽캄은 포트 윌리엄 헨리(Fort William Henry) 전투(1757. 8. 3 ~ 9)에서 또 다시 승리를 거두고 요새를 함락했습니다. 거기다 뒤이어 영국군 민병대가 프랑스 군과 조우, 참패를 당하고(1757. 11. 12, German Flatts), 식민지 변경에서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인디언 부족들이 영국 식민지를 공격하는 일이 빈발, 12월 8일에는 Bloody Creek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 영국군이 패퇴하고 맙니다.

한편 영국군은 포트 윌리엄 헨리를 상실한 이후 새로운 전략을 구상합니다. 이는 프랑스령 퀘벡에 대한 직접적인 수륙 동시 공격 시도였지요. 우선 영국 본국에선 계속된 패전으로 인한 위기감때문에 15,000에 달하는 대규모 정규군 병력과 해군 함대를 파견, 프랑스령 북아메리카로 가는 길목인, 노바스코샤 반도 동단 케이프브렌턴 섬의 루이스버그(Louisbourg)를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뉴잉글랜드에서는 주둔군 사령관 제임스 애버크롬비(James Abercrombie) 장군은 16,000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프랑스령 퀘벡을 육로로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그 길목에 있는 까이용(Carillon) 요새가 그 첫 목표였죠.

먼저 공격이 이루어진 건 영국 본토에서 출발한 함대의 루이스버그 공격이었습니다. 6월 8일, 제임스 울프(James Wolfe)가 지휘하는 선두부대가 해안에 무사히 상륙했고, 이들 영국군 대부대는 곧 루이스버그를 포위합니다. 프랑스 군은 해군 전력도 보잘 것 없었고, 전투병력도 4,000명 내외에 불과해 압도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때문에 포위전은 약 2달여동안 지속되었습니다.

7월 23일 루이스버그 요새의 성벽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이곳으로 영국군이 밀려오자 프랑스측에 승기는 사라졌고 결국 7월 26일, 프랑스 요새 사령관이 백기를 들면서 요새가 함락됩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 승리로 무조건 좋아라 할 처지가 아니었지요. 동시에 진행된 육로 공격에서, 애버크롬비의 대규모 군세가 프랑스 군에게 격퇴당한 겁니다.

프랑스의 몽캄 장군은 요새에서 농성하지 않고 4,000도 안되는 병력으로 요새를 나서서 요격 및 게릴라전으로 응전했습니다. 더군다나 주변 전장은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기 매우 힘든 삼림지대에 소로 뿐이어서 영국군의 대군이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지요. 프랑스 군은 삼림의 소로 곳곳에 나무를 쓰러트려 방벽을 건설하고 장애물을 구축하며 포병대를 효과적으로 활용, 자기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국군을 상대했고, 영국군은 축차투입 축차소모를 밥먹듯 하다가 결국 공격에 실패합니다.(1758. 7. 8)

까이용 전투로 영국군은 전사 551명, 실종 77명, 부상 1,356명의 피해를 입고 나머지 부대도 와해되다시피 하는 경악할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프랑스군은 훨씬 적은 병력으로 임전했음에도 전사 104명, 부상 273명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피해를 입었죠. 더군다나 이 전투에 투입된 프랑스군이 다 정규군도 아니었고, 민병대와 원주민 동맹군이 혼합된 구성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까이용 전투 패배 이후 전열을 추스른 영국군은 곧 반격을 나서, 8월 25일에 온타리오 호반의 포트 프론트락(Fort Frontenac)을 함락시킵니다. 뒤이어 포트 리고니어(Fort Ligonier)마저 10월에 함락되면서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해오죠. 까이용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은 퀘벡 및 뉴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본국의 지원을 차단하며 차근차근 프랑스 식민지를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지나 1759년 6월 24일, La Belle-Famille 전투에서 영국-이로쿼이 연합군이 프랑스 군을 격퇴한 것을 시작으로 재개된 전역은 이틀 뒤, 포트 나이아가라(Fort Niagara)가 함락되면서 그 압박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몽캄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아직도 건재, 7월 31일의 보포르(Beauport)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의 영국군 선두부대를 격파, 퀘벡에 대한 공격시도를 일단 좌절시킵니다.

이에 제임스 울프의 영국군은 암벽을 타야 하는 루트를 이용, 기습적으로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강을 도하하여 퀘벡을 직접 공격하는 시도를 했고 뒤늦게 몽캄의 프랑스 군이 이에 맞서면서 북미전역의 승패를 결정짓는 회전이 벌어집니다.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1759. 9. 13)는 퀘벡을 바로 코앞에 두고 양군의 주력이 모두 출동한 결전이었습니다.

양군의 병력은 서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문제는 영국군은 모두 정규군이었던 반면, 프랑스 군은 민병의 비율이 높아 제대로 된 정규 회전에 부적합했다는 거겠지요. 민병들은 사실 게릴라전이나 시가전, 후방교란전 등에는 능숙하지만 당시의 진형 중심의 라인배틀에는 매우 부적합했습니다.

결국 양측의 화력교환 직후 프랑스 민병대가 공포에 빠져 와해되었고, 이 패닉에 다른 부대에까지 퍼지면서 프랑스 군은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승승장구하며 그 명성을 떨친 몽캄 장군은 무너지는 전선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부대를 재정비하려다 총탄에 맞아 이곳에서 그 최후를 맞이했고, 기습적인 진격으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낸 영국의 제임스 울프 장군도 이 전투에서 몇 안 되는 영국군 전사자 명단에 오르게 됩니다.
제임스 울프의 죽음 (벤자민 웨스트, 1770)
루이스버그 전투 이래 북미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영국군 지휘관은 자신의 경쟁자이기도 한 프랑스의 몽캄과 같은 날 같은 전투를 치루다 죽었다. 그의 유언은 "적의 후퇴를 저지하라". 왠지 충무공 삘이 나는데 위대한 장군들은 다 이런 걸까나.

하여튼 이 전투로 프랑스 북미 식민지의 거점인 퀘벡이 함락되면서 북미 전역은 사실상 종결됩니다. 프랑스는 여전히 식민지를 구원하고자 했으나 바다는 영국이 지배한 상태였고, 프랑스 본국의 식민지 구원 시도를 철저히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나 아직 몬트리올이 남아 있었고, 몽캄 장군 전사 이후 지휘권을 접수한 프랑시스 데 가스통-슈발리에 데 레비(Francis de Gaston, Chevalier de Levis)가 몬트리올의 전력 및 기타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퀘벡에 대한 탈환을 시도합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5,000명이었고 영국군은 퀘벡 점령 직후 병력 다수가 철수한 지라 3,800명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맞서야 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프랑스 군은 결사적으로 돌격, 영국군을 물러나게 하고 마지막 승리를 장식합니다.(생트 푸아[Sainte-Foy] 전투, 1760. 4. 28)

그러나 이 전투 직후,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이 즉시 수송선으로 새로운 지상군 병력을 퀘벡에 급파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이 가진 최대의 이점이었지요. 프랑스 군은 기껏 마지막 전투에서 이겨놓고도 영국의 증원군때문에 퀘벡을 탈환하지 못하고 결국 물러섰으며 이들은 크고 작은 전투 후에 1762년 9월에 마지막으로 항복합니다.

북미 전역 최후의 전투는 1762년 9월 15일, 뉴펀들랜드 섬 세인트 존에서 일어난 Signal Hill 전투입니다. Signal Hill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군 소부대가 공격을 개시, 프랑스 군은 지휘관이 중상을 입는 등 크고작은 피해를 입고 언덕에서 물러나 세인트 존으로 철수합니다. 이로서 세인트 존 요새는 영국군의 시야에 훤히 보이게 되었고 직접적인 포병 사격에 노출되었으며, 결국 세인트 존 요새의 프랑스 수비대가 9월 18일 백기를 들게 됩니다.

이로서 영국은 핵심 전역이었던 북미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퀘벡을 비롯한 뉴프랑스를 모조리 지배하고 북아메리카에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 전쟁은 동시에 영국 본토의 정규군이 아닌 영국 식민지 주둔군은 매우 무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식민지 민병대들의 전력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바로 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었죠.



p.s 1 : 7년전쟁 북미 전역(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예전에 월광토끼님이 훨씬 자세히 포스팅하신 게 있어서 아래에 링크를 걸어두니 같이 봐주시면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제 포스팅보다는 내용이나 이해 면에서 훨씬 풍부하거든요.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1)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2)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3)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4)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5)
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6)

p.s 2 : 다음에는 다시 유럽 전역으로의 복귀이군요 데굴데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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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푸른별빛 2008/12/25 17:33 # 답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두번째 문단의 '양국 동인도회사의 충돌에 과했던 인도 전역과 달리...'에서 <충돌에 불과했던> 이 맞는거 맞겠죠? ^^;;

    이 때 활약했던 영국 민병대가 패트리어트에 나왔던 벤자민 마틴의 그 민병대겠군요.

    프랑스쪽 지휘관들은 왜 국가 명성에 비해서 능력에서 뒤처지는건지 궁금합니다. 소소하게 유능한 사람이야 포스팅에 나왔던 몽캄 같은 사람이 있지만 왠지 영국이나 독일 쪽에 비해 처지는 것 같아요...제가 잘 몰라서 그런건가요 -_-a
  • Ladenijoa 2008/12/25 20:57 #

    예, 문맥은 수정했습니다. 꾸벅

    프랑스는 대체 왜 그리 지휘관들이 안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싸움을 못하는 특성인가;;
  • OTIKA 2008/12/25 18:04 # 답글

    '몽칼름'이 아니라 '몽캄'이군요(...)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조셉 커민스, 만들어진 역사)여러 장 중 하나로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퀘벡 전투)가 나와서 이번편이 퀘벡일거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나저나 고유명사까지 왜 영어식 번역을 하는건지-_-;;
    (독일어, 프랑스어 고유명사를 영어식 발음으로 써놓은것까진 뭐 그렇다고 쳐도
    가장 압박스러웠던건 '세키한(赤飯)'이 '팥(찰)밥'인데 '작은 콩과 함께 끓인 쌀'이라고
    번역해놓은거였;; '팥'이 일본어로 '小豆(아즈키)'라서
    영어로 쓸때 '작은 콩'이 되버린거 같은데 이상하다 싶으면 해당언어 번역가한테
    물어보기라도 할것이지 말입니다-_-;;;)
  • Ladenijoa 2008/12/25 20:58 #

    사실 저도 영어식 발음과 기타 프랑스, 독일, 러시아식 발음 등이 헷갈리는 편입니다.
    그래도 대놓고 영어식 발음 표기가 있으면 그런 표기는 고쳐야 하는데 그런 번역마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요
  • 핌군 2008/12/25 19:18 # 답글

    프랑스 인 치고는 매우 유능했고 군사적으로 탁월했던 장군...OTL

    도대체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군사 강국인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 Ladenijoa 2008/12/25 20:59 #

    프랑스가 군사강국인 이유야 그냥 국력 자체가 강성했기 때문이죠. 유럽에서 비교적 일찍 통일국가를 성립했고 농업생산력 등이 뛰어난 데다 지중해-대서양을 같이 접하니 어업도 유리.. 그러다보니 부양인구도 많고 말이죠
  • 윙후사르 2008/12/25 19:47 # 삭제 답글

    도대체 앙리 4세, 튀렌, 콩데로 이어지는 환상의 장군들은 18세기에 맥이 끊겼단 말인가!!! 프랑스인 치고 매우 유능한 장군이라니!!!
  • Ladenijoa 2008/12/25 20:59 #

    그러니 나폴레옹 전쟁때 나폴레옹 빼면 다른 장군들은 털리기만 하죠 (먼산)
  • 계원필경 2008/12/25 21:41 # 답글

    이때 관련된 영화가 바로 라스트 모히칸인거죠...(그나저나 퀘벡 분리 운동에 관한 것도...)
  • Ladenijoa 2008/12/26 13:43 #

    퀘벡에 대해선 아는 바가...;;
  • 행인1 2008/12/25 23:48 # 답글

    다 이기고도 재해권이 없어서 결국은 안습 크리가...
  • Ladenijoa 2008/12/26 13:44 #

    영프 전쟁은 늘 이렇게 돌아가죠-ㅅ-
  • gmmk11 2008/12/26 02:55 # 삭제 답글

    요새가 굉장히 많네요.

    요새가 아니면 지키기 힘든 지형인가요.
    요새가 허접해서 짓기 쉬워서 그런가요
  • Ladenijoa 2008/12/26 13:44 #

    넓은 식민지에 병력은 얼마 안 되니 요새라도 지어서 일부 요충지 위주의 거점방어를 하자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 Empiric 2008/12/26 04:36 # 삭제 답글

    결론은 항상 캐사기 유닛 로열 네이비 ㅠ.ㅠ
  • Ladenijoa 2008/12/26 13:44 #

    로열 네이비가 좀 킹왕짱이죠
  • 티이거 2008/12/26 10:26 # 삭제 답글

    프랑스는 멱사적으로 육군 대국이었던 적은 많으나 강국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 전력 가지고 유럽을 제패한 역사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나폴레옹은 뭐냐?고 하신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죠.... 나폴레옹이 프랑스 출신입니까?
  • Ladenijoa 2008/12/26 13:46 #

    유럽의 대국 중 유럽을 제패하지 못한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죠 거의-ㅅ-
    이탈리아야 옛날옛적 로마 시대에, 스페인은 한창 잘 나가던 펠리페 2세때, 독일이 총통각하때, 영국은 사실상 18세기 이후 꾸준히, 러시아는 대원수 동지때... 프랑스는 나폴레옹 빼면 이거 뭐...;;
  • doct 2011/08/03 18:25 # 삭제

    프랑스가 원래 강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탄생할수 있었건 것입니다.
    로마제국 멸망이후 가장 강력했던 국가는 유럽에서 프랑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소시민 2008/12/26 11:11 # 답글

    프랑스인 치고는 매우 유능했고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던 장군

    - 좀 많이 굴욕이군요.

    인도에 이어 퀘백까지 상실하니 루이 15세의 상심이 대단했겠군요.
  • Ladenijoa 2008/12/26 13:46 #

    식민지를 상실한 건 상심이었지만 전체적인 전황 자체, 가장 중요한 유럽 전역이 프랑스 측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기분은 좋았을지도요 ㅎㅎ
  • 들꽃향기 2008/12/26 13:24 # 삭제 답글

    프랑스가 기왕이면 독일지역으로 보낼 병력이나 군사력을, 북아메리카나 식민지 전역에 기울였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특히 페리 엔더슨 같은 경우는 유럽에서의 패권을 중시하는 귀족들의 구 엘리트적인 사고가, 신대륙과 상업적 이익의 수호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성향을 낳았다고 이 시기 프랑스 지배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더군요;;

    물론 해군력 확장이라는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걸 생각하면 무리가 없진 않지만, 미독립전쟁 시기에 프랑스 해군도 국력을 기울였을 때 나름 괜찮은 성과를 올렸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불가능 한 일은 아닌것만 같습니다.
  • Ladenijoa 2008/12/26 13:47 #

    프랑스 해군은 1759년 영국 해군에게 털리면서 사실상 7년전쟁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사실 그 이전에라도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증원을 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는데, 이건 뭐 가정에 불과하니^^
  • leopord 2008/12/28 01:47 # 답글

    갑자기 제임스 울프에 대해 찬사를 연발하던 몽고메리 할아버지가 생각나는군요;;

    인도 전역과 마찬가지로, 게릴라전을 포함한 소부대전술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기엔 여력이 없는 식민지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보어전쟁이 그랬듯이 말이죠...
  • Ladenijoa 2008/12/28 13:47 #

    몽고메리 영감은 그저 우리 위대한 대영제국 우왕 이거 하나니 답이 없..;;;

    본국의 증원이 어려운 저런 식민지 전역은 진짜 소부대전술이 전역의 판세를 결정짓는 일이 많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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