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은 보통 서양과 동양으로 나뉘지요. 대륙 동쪽에 위치한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 및 그 주변의 소국들을 보통 동양으로 칭하고, 대륙 서쪽 유럽을 서양으로 칭하지요. 그리고 이 가운데 있는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일대를 중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과 중양은 사실 오래 전부터 꾸준한 교류가 있어 왔습니다. 이들은 지중해를 공유했고, 이들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서로 상대방의 진영 깊숙히 쳐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서양에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까지 나아간 적이 있었고, 중양에선 페르시아가 자주 그리스를 정벌했었으며 이후의 이슬람 세력이 과감하게 남프랑스로 진격한 적도 있었죠.
이처럼 서양과 중양은 서로 그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고 활발한 교류/충돌을 자주하고 있었습니다만(그래서 포괄적으로는 이들 중양 지역도 서양으로 합치기도 하죠.) 동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동양의 중국 문화권과 중양의 페르시아 사이에는 히말라야 산맥, 파미르 고원, 고비 사막 및 알타이 사막과 같은 온갖 험준한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전한의 장건이 처음으로 이 지역을 방문, 실크로드를 개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로마의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보낸 사절단이 바다길을 통해 (후)한나라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후한도 붕괴, 삼국시대에 이어 5호 16국, 남북조 시대로 이어지는 오랜 분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양과 동양이 오랜 기간 혼란에 빠지면서 더 이상 외부세계에 눈길을 돌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7세기 들어서면서 중국이 통일되고, 중양 지역에서도 급속히 성장한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중동,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으로 급속히 확대되는 일이 생깁니다. 서양에서도 오랜 혼란 끝에 동쪽의 비잔틴, 서쪽의 프랑크로 대표되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이슬람 세력과 충돌이 일어나죠.
유럽의 두 강대국에 막혀 서쪽으로의 진출이 막힌 이슬람 세력은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동양에서도, 신라와 발해에 의해 만주 및 한반도 지배가 좌절된 당이 남쪽과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죠. 남쪽에 대한 관심은 북베트남 일대의 지배로 이어졌고, 서쪽으로의 관심은 대규모 서역 원정으로 연결됩니다.
동양, 서양, 중양의 대략적인 구분. 서양과 중양은 역사 이래로 계속 꾸준히 교류를 해왔고 상호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동양은 거의 독자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이따금 사신 및 상인에 의한 교류가 아니면 왕래조차 어려웠다. 때문에 서양과 중양을 그냥 합쳐서 서양으로 부르기도...
서기 704년, 이란 북동부의 호라산 총독이 된 옴미아드 왕조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ybah ibn Muslim)은 705년에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장악하고, 709년까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일대를 완전히 확보했으며, 712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거점인 도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합니다. 이로서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패권이 공고히 되죠.
한편 당은 국가의 외곽 지역마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 변경의 수비 및 주변국 정벌의 임무를 맡깁니다. 고구려를 멸하고 세운 안동도호부, 베트남 지역에 설치한 안남도호부, 북방민족을 담당하기 위한 안북도호부, 그리고 서역 정벌을 위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등이죠.
당 현종 27년(서기 740년), 당의 고구려계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우전, 달해부를 정벌합니다. 이 공으로 그는 당의 안서부도호, 사진도지병마사로 임명됩니다. 현종 36년(서기 747년)에는 서역 일대가 토번과 동맹관계를 맺거나 그들에게 복속당하자 역시 고선지를 출병시켜, 토번과 그 동맹국 소발률국을 격파하고, 72개국을 복속시켰습니다.(72개국이라기보다는 72개 부족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원정은 군사적으로도 완벽한 승리였고, 단번에 서역의 지배권을 토번으로부터 탈환했을 뿐 아니라, 약탈한 막대한 전리품 등으로 당 조정의 대환영을 받으며 당 제국의 서역 정벌 전문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와 같은 거창한 이름의 직책이 괜한 게 아니죠.
한편,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이후 주변 지역의 이슬람 포교에 성공하고 세력을 공고히 여기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중엽에는 옴미아드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면서 잠시 주춤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747년에는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750년에 최종적으로 옴미아드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세계가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면서 다시 대외확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 무렵, 바로 그 문제의 서역에서 석국이 당의 서역 원정에 불안감을 가지고 이슬람 세력과 동맹을 맺습니다.
당 조정은 결코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서역정벌 전문가 고선지에게 다시 출병을 명합니다. 당 현종 39년(서기 750년)의 이 원정에서 고선지의 당군은 다시 한 번 혁혁한 승리를 거두며 석국을 점령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아 옵니다. 당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선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직책(칭호?)을 추가해 줍니다.
그런데 고선지가 정발한 석국이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일대입니다. 우즈베키스탄, 바로 8세기 초에 옴미아드 왕조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이 장악하고 나아간 최대 진출지점입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자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사마르칸트가 코앞이었죠. 현재 지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일대가 바로 당과 이슬람 세력과 충돌 지점이었던 것입니다.
서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이슬람과 당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당의 계속되는 군사적 위협에 공포를 느낀 중앙아시아 소국들이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지야드 이븐 사리프(Ziyard ibn Salih)에게 구원을 요청, 그가 이 구원 제의를 받아들여 아바스 왕조의 정규 부대가 출병, 중앙아시아 동맹국과 연합합니다. 당 조정 역시 이를 무시할 수 없어, 현종 40년(서기 751년) 에이스 고선지를 다시 한 번 내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의 배경입니다. 사실 탈라스 전투는 전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전투 진행양상이 어떤 지 후대인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고선지의 당군과 동맹을 맺은 현지 군대가 작전대로 배반을 일으켜 당군이 패했다는 정도지요. 생존자가 얼마 안 되는 참패라고 할 정도니까요. 고선지 본인도 안록산의 난 도중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다만 추정하자면, 고선지와 당군은 군사적으로는 뛰어났을 지 몰라도 점령지 정책은 매우 무능했던 거 같습니다. 당 조정을 만족시킬 만큼의 전리품을 보낼 정도로 약탈했다면 대체 그 소국들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강탈했다는 걸까요. 얼마나 현지인들을 무시했으면 동맹군이 도중에 배반할까요?뭐, 이건 포로로 잡은 석국 왕을 참수한 당 조정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반대로 이슬람 세력은 진출한 지 불과 반 세기도 안 되어 현지에 이슬람 교를 빠르게 보급시키고 군사적 정벌은 필요한 곳에 국한하며 나름대로 타협 및 융화책을 써 현지 국가, 부족들을 동맹으로 포섭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승패가 갈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탈라스 전투는 이처럼 중앙아시아 일대를 둘러싸고, 당시 세계 최강의 두 국가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가 펼친 하나의 문명의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 전투로 서역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확고한 우위가 완성되었으며, 당을 중심으로 한 동양-중국 세력은 이후 거의 400년동안 서역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당은 몇 년 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더 이상 대외정벌을 할 여력이 없었으며, 그 뒤의 5대 10국에 이은 통일왕조 송은 군사적으로 너무 무력했으니까요.
이슬람 세력도 중앙아시아 일대의 확보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도 이후 급속도로 내부가 흔들리면서 통일 이슬람 왕조의 성격이 크게 퇴색되어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지요.
이후 동양 세력이 다시 서역으로 나아가게 되려면 칭기즈 칸이 등장하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 오랜 기간동안 동양 세력은 서역으로의 진출에 실패했고, 탈라스 전투는 중국 세력의 진출 한계를 보여준 하나의 역사적 대 사건이었습니다.
p.s : 고선지에 대한 평가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동양의 한니발(...)이라니,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영웅이니 등등. 과연 고선지가 고구려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높이 띄워주었을까요?-_-;;
동양의 한니발, 나폴레옹이라는 찬사는 어디까지나 그가 파미르 고원 일대를 넘어 작전했다는 점 하나 때문이고, 사실 그의 군사적 승리라는 것도 아바스 왕조군 이전의 지방 소국 및 부족들을 상대로 한 대승이었습니다. 정작 아바스 왕조의 정규군을 상대로 한 탈레스 전투에선 참패하고 말았죠.
혹자는 서양에 제지법을 전해주어 동서 문화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는데,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당나라 기술자가 제지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건 가장 유력한 학설 중 하나라지만 과연 그게 고선지가 의도한 거고 기여한 걸까요?(...)
그런데 서양과 중양은 사실 오래 전부터 꾸준한 교류가 있어 왔습니다. 이들은 지중해를 공유했고, 이들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서로 상대방의 진영 깊숙히 쳐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서양에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까지 나아간 적이 있었고, 중양에선 페르시아가 자주 그리스를 정벌했었으며 이후의 이슬람 세력이 과감하게 남프랑스로 진격한 적도 있었죠.
이처럼 서양과 중양은 서로 그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고 활발한 교류/충돌을 자주하고 있었습니다만(그래서 포괄적으로는 이들 중양 지역도 서양으로 합치기도 하죠.) 동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동양의 중국 문화권과 중양의 페르시아 사이에는 히말라야 산맥, 파미르 고원, 고비 사막 및 알타이 사막과 같은 온갖 험준한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전한의 장건이 처음으로 이 지역을 방문, 실크로드를 개척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로마의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보낸 사절단이 바다길을 통해 (후)한나라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후한도 붕괴, 삼국시대에 이어 5호 16국, 남북조 시대로 이어지는 오랜 분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양과 동양이 오랜 기간 혼란에 빠지면서 더 이상 외부세계에 눈길을 돌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7세기 들어서면서 중국이 통일되고, 중양 지역에서도 급속히 성장한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중동,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으로 급속히 확대되는 일이 생깁니다. 서양에서도 오랜 혼란 끝에 동쪽의 비잔틴, 서쪽의 프랑크로 대표되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이슬람 세력과 충돌이 일어나죠.
유럽의 두 강대국에 막혀 서쪽으로의 진출이 막힌 이슬람 세력은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동양에서도, 신라와 발해에 의해 만주 및 한반도 지배가 좌절된 당이 남쪽과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죠. 남쪽에 대한 관심은 북베트남 일대의 지배로 이어졌고, 서쪽으로의 관심은 대규모 서역 원정으로 연결됩니다.
서기 704년, 이란 북동부의 호라산 총독이 된 옴미아드 왕조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ybah ibn Muslim)은 705년에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장악하고, 709년까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일대를 완전히 확보했으며, 712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거점인 도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합니다. 이로서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패권이 공고히 되죠.
한편 당은 국가의 외곽 지역마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 변경의 수비 및 주변국 정벌의 임무를 맡깁니다. 고구려를 멸하고 세운 안동도호부, 베트남 지역에 설치한 안남도호부, 북방민족을 담당하기 위한 안북도호부, 그리고 서역 정벌을 위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등이죠.
당 현종 27년(서기 740년), 당의 고구려계 장군 고선지(高仙芝)가 우전, 달해부를 정벌합니다. 이 공으로 그는 당의 안서부도호, 사진도지병마사로 임명됩니다. 현종 36년(서기 747년)에는 서역 일대가 토번과 동맹관계를 맺거나 그들에게 복속당하자 역시 고선지를 출병시켜, 토번과 그 동맹국 소발률국을 격파하고, 72개국을 복속시켰습니다.(72개국이라기보다는 72개 부족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원정은 군사적으로도 완벽한 승리였고, 단번에 서역의 지배권을 토번으로부터 탈환했을 뿐 아니라, 약탈한 막대한 전리품 등으로 당 조정의 대환영을 받으며 당 제국의 서역 정벌 전문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와 같은 거창한 이름의 직책이 괜한 게 아니죠.
한편,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이후 주변 지역의 이슬람 포교에 성공하고 세력을 공고히 여기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중엽에는 옴미아드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면서 잠시 주춤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747년에는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750년에 최종적으로 옴미아드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세계가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면서 다시 대외확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 무렵, 바로 그 문제의 서역에서 석국이 당의 서역 원정에 불안감을 가지고 이슬람 세력과 동맹을 맺습니다.
당 조정은 결코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서역정벌 전문가 고선지에게 다시 출병을 명합니다. 당 현종 39년(서기 750년)의 이 원정에서 고선지의 당군은 다시 한 번 혁혁한 승리를 거두며 석국을 점령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아 옵니다. 당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선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직책(칭호?)을 추가해 줍니다.
그런데 고선지가 정발한 석국이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일대입니다. 우즈베키스탄, 바로 8세기 초에 옴미아드 왕조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이 장악하고 나아간 최대 진출지점입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자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사마르칸트가 코앞이었죠. 현재 지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동부 일대가 바로 당과 이슬람 세력과 충돌 지점이었던 것입니다.
서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이슬람과 당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당의 계속되는 군사적 위협에 공포를 느낀 중앙아시아 소국들이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지야드 이븐 사리프(Ziyard ibn Salih)에게 구원을 요청, 그가 이 구원 제의를 받아들여 아바스 왕조의 정규 부대가 출병, 중앙아시아 동맹국과 연합합니다. 당 조정 역시 이를 무시할 수 없어, 현종 40년(서기 751년) 에이스 고선지를 다시 한 번 내보냅니다.
751년, 탈라스 전투 직전의 양 세력의 움직임
페르시아의 호라산 주를 거점으로 하는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의 전진기지이자 요충지 사마르칸트(A)와, 750년 고선지가 정벌한 석국(타슈켄트)은 매우 근접해 있었다. 안서도후부(B)에서 출발, 서역 일대를 정벌한 당나라 군과 사마르칸트가 위협받게 된 이슬람 세력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탈라스(검은색 빗금)에서 충돌하게 된다.이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의 배경입니다. 사실 탈라스 전투는 전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전투 진행양상이 어떤 지 후대인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고선지의 당군과 동맹을 맺은 현지 군대가 작전대로 배반을 일으켜 당군이 패했다는 정도지요. 생존자가 얼마 안 되는 참패라고 할 정도니까요. 고선지 본인도 안록산의 난 도중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다만 추정하자면, 고선지와 당군은 군사적으로는 뛰어났을 지 몰라도 점령지 정책은 매우 무능했던 거 같습니다. 당 조정을 만족시킬 만큼의 전리품을 보낼 정도로 약탈했다면 대체 그 소국들에게서 무엇을 얼마나 강탈했다는 걸까요. 얼마나 현지인들을 무시했으면 동맹군이 도중에 배반할까요?뭐, 이건 포로로 잡은 석국 왕을 참수한 당 조정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반대로 이슬람 세력은 진출한 지 불과 반 세기도 안 되어 현지에 이슬람 교를 빠르게 보급시키고 군사적 정벌은 필요한 곳에 국한하며 나름대로 타협 및 융화책을 써 현지 국가, 부족들을 동맹으로 포섭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승패가 갈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탈라스 전투는 이처럼 중앙아시아 일대를 둘러싸고, 당시 세계 최강의 두 국가 아바스 왕조와 당나라가 펼친 하나의 문명의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 전투로 서역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확고한 우위가 완성되었으며, 당을 중심으로 한 동양-중국 세력은 이후 거의 400년동안 서역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당은 몇 년 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더 이상 대외정벌을 할 여력이 없었으며, 그 뒤의 5대 10국에 이은 통일왕조 송은 군사적으로 너무 무력했으니까요.
이슬람 세력도 중앙아시아 일대의 확보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도 이후 급속도로 내부가 흔들리면서 통일 이슬람 왕조의 성격이 크게 퇴색되어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지요.
이후 동양 세력이 다시 서역으로 나아가게 되려면 칭기즈 칸이 등장하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 오랜 기간동안 동양 세력은 서역으로의 진출에 실패했고, 탈라스 전투는 중국 세력의 진출 한계를 보여준 하나의 역사적 대 사건이었습니다.
p.s : 고선지에 대한 평가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동양의 한니발(...)이라니,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영웅이니 등등. 과연 고선지가 고구려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높이 띄워주었을까요?-_-;;
동양의 한니발, 나폴레옹이라는 찬사는 어디까지나 그가 파미르 고원 일대를 넘어 작전했다는 점 하나 때문이고, 사실 그의 군사적 승리라는 것도 아바스 왕조군 이전의 지방 소국 및 부족들을 상대로 한 대승이었습니다. 정작 아바스 왕조의 정규군을 상대로 한 탈레스 전투에선 참패하고 말았죠.
혹자는 서양에 제지법을 전해주어 동서 문화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는데, 전쟁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당나라 기술자가 제지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건 가장 유력한 학설 중 하나라지만 과연 그게 고선지가 의도한 거고 기여한 걸까요?(...)

얼어죽을 유럽문명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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